공동구매하고 벤치마킹하고 서비스·매장관리까지..멀티플레이어 돼야
#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은행의 구조조정이 거세졌다. 은행원이었던 김 모씨는 당시 정리해고 대상으로 회사를 나오게 되었고, 취업시장이 얼어붙어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더 이상 취업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퇴직금과 주택담보대출을 합해 A치킨 전문점을 열었다.
회사의 활발한 광고 덕분에 오픈 초기 일매출이 100만∼150만원을 넘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지만 경영상의 이유로 본사가 갑자기 문을 닫고 말았다.
사업 경험이 전무했던 김씨는 본사가 사라지자 식자재와 홍보물 공급부터 문제가 발생했고, 재료를 구해도 일관된 맛을 유지하기 힘들어 고객이 외면하자 결국 사업 6개월 만에 투자금도 회수하지 못한 채 점포를 넘기고 말았다.
#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던 30대 초반 여성인 한 모씨는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근무하던 회사 역시 섬유를 주로 취급했기에 회사를 나온 한씨는 여대 앞에서 여성복 브랜드 대리점을 시작했다.
평소 즐겨 입는 브랜드여서 제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했던 그. 그러나 그의 자신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추석을 앞두고 가을 신제품을 다량으로 주문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본사의 부도 소식이 들렸던 것. 한 씨는 한 푼이라도 건져볼 요량으로 보유한 옷들을 절반 값에 판매하려 했지만 가치 없는 망한 브랜드의 옷을 사는 이는 드물었다. 결국 한씨는 매장 문을 닫으며 땡처리 전문가에게 원가의 10% 정도의 가격만 받고 제품을 넘겨야 했다. 문을 닫은 후 그에게 남은 것은 매장을 열 때 빌린 돈에 대한 채무이행 통지서뿐이었다.
외환위기는 창업계의 호황을 가져왔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늘어난 퇴직자들이 창업시장으로 몰렸고 우후죽순으로 프랜차이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장식했던 브랜드 중 아직까지 건재한 곳은 이미 대형화된 몇몇 프랜차이즈로 압축된다.
군소 브랜드들은 경쟁에 밀려 이미 시장에서 퇴출됐거나 경영상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문을 닫았다. 심한 경우는 악의적으로 사주가 고의 부도를 내고 회사 돈을 챙겨 도피하기도 했다. 브랜드가 공중 분해되면 김씨와 한씨 같은 수많은 선의의 피해자가 양산된다. 브랜드 부도 후 얼마간은 버틸 수 있지만 1년 내에 대부분 업종을 전환하거나 폐업하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는 가맹점들은 공동으로 또 개별적으로 생존전략을 모색한 경우다.
#본사 도덕적 치명타 입은 경우 연쇄 피해
2000년대 초반 국내에 피시방 프랜차이즈 시대를 열었던 C피시방 한때 가맹점수와 매출에서 업계 선두를 달렸지만 사주였던 윤모씨가 수백억원을 횡령해 해외로 도피하면서 한때 경영상의 위기를 겪었다. C피시방 점주들은 본사의 경영이 정상화될 때까지 점주협의회를 구성해 운영상의 문제점을 해결했다.
자신들 스스로 영업 매뉴얼을 점검하고 우수 매장들의 운영 노하우를 공유했다. 결국 폐업률을 최소화한 C피시방은 인수자가 나타나면서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가맹점수도 부도 이전 수준인 800여 개를 넘어섰다.
W치킨 전문점도 마찬가지다. C피시방이 대대적으로 점주협의회를 구성했다면 300여 개에 가까운 매장을 보유했던 W치킨 전문점은 가까운 지역 매장 점주들이 소규모 협의체를 구성했다. 이들은 물류문제부터 해결에 나섰다. 재료를 공급해 줄 다른 루트를 찾았고 주재료인 치킨과 소스의 구입처를 확보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야채 등 부재료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의 정보를 공유하고 공급이 중단된 스티커와 전단지를 공동으로 제작했다.
C피시방과 W치킨점이 본사의 부도 소식에 신속하게 대처해 폐점률을 최소화한 것과 달리 대부분의 가맹점은 본사 부도라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연쇄적으로 문을 닫는다. 단순한 부도라면 그나마 가맹점이 살아남을 여지가 있다. 그러나 본사가 심각한 고객불신을 초래하는 경우 가맹점은 재기불능 상태가 된다. 상어류인 ‘카스트와’와 열대어 ‘만다이’를 참치로 속여 공급한 H참치는 관계자 17명이 구속, 또는 불구속되면서 브랜드의 신뢰도가 무너졌고 200여 가맹점은 연쇄부도의 피해를 입었다.
#끊임없는 정보 공유와 벤치마킹만이 살 길
“본사가 망했다고 가맹점주가 대책을 세우지 않고 망연자실하고만 있는다면 문을 닫는 시간만 빨라질 뿐이다” 창업전문가들은 따로 또 같이 대책을 세우는 것만이 가맹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실제로 다수의 가맹점이 생존한 경우 공생을 모색한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점주협의체를 구성해 가맹점 운영을 위한 기본적인 물류를 해결하는 것부터 법적 제도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는 협의회장이 창업컨설턴트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본사가 사라지면 우선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물류 공급의 중단, 슈퍼바이저의 부재로 인한 가맹점 문제점 진단 부족, 조직적인 홍보 부재로 인한 소비자 인지도 저하 등이 대표적이다. 외식업의 경우 음식 맛이 매장마다 달라지고 서비스의 표준화도 문제가 되기 일쑤다.
한 창업 컨설턴트는 “이러한 문제는 점주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며 “우선 점주 간 유대관계를 끈끈하게 하고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고 장기적으로는 본사의 회생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점주 간 협의체를 결성했거나 커뮤니티가 마련돼 물류가 해결됐어도 할 일은 많다. 본사에서 진행하던 신메뉴 개발도 자체적으로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물류와 메뉴, 서비스 표준화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면 이제 점주 개인의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프랜차이즈든 아니든 주변에서 눈에 띄는 동종업계 매장을 자주 들러 서비스와 맛을 체크하고 이를 자신의 매장에 도입해야 한다.
다른 매장에서 신메뉴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아무리 점주들의 힘이 결집돼도 창업자 본인의 노력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본사가 건실해도 문을 닫는 가맹점과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본사가 망한 뒤 10년간 같은 간판을 걸고 영업 중인 와그너치킨 반포점 김주애 사장은 “본사가 사라졌다고 뒷짐만 지고 있다간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을 수 있다” 며 “본사가 사라진 뒤 본사의 몫까지 창업자의 노력이 더해지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창업자의 마인드가 본사보다 중요하다는 얘기다.
와그너치킨 반포점은 인근 가맹점들과 점주협의체를 구성하고 물류와 홍보, 판촉물을 공동 제작하고 서로간의 노하우를 교환하면서 10년 이상 본사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생존 전략 10계명
1. 점주끼리 단체를 결성하라: 점주끼리 모여 본사를 대신할 단체를 결성해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
2. 단체 결성 뒤 물류를 해결하라: 물류공급이 중단되면 맛이 달라질 수 있다. 공동으로 새로운 물류 공급처를 찾아야 한다.
3. 광고 대신 입소문을 내라: 본사가 건재했을 때는 신문이며 TV 광고가 매출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본사가 없을 때는 맛과 서비스, 홍보물 배포 등으로 입소문 전략을 펴야 한다.
4. 점주끼리 서로의 맛과 서비스를 평가하라: 맛과 서비스의 질을 유지하려면 점주끼리 다른 매장을 찾아 문제점을 알려주고 이를 개선해나가야 한다.
5. 단가를 낮추지 마라: 외식업의 경우 본사가 사라졌다고 단가를 낮추면 오히려 소비자의 인식을 악화시킬 수 있다. 또 채산성이 나빠져 장사는 잘 돼도 적자를 볼 수 있다.
6. 낮은 자세로 임하라: 본사 브랜드의 영향력 때문에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던 매장이라도 고객에게 자신을 낮추고 고객의 평가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7. 긴축재정을 실시하라: 당장의 매출 영향이 없더라도 본사 부재로 인한 매출 저하의 우려가 있으므로 인건비 비중을 낮추고 긴축 재정을 실시하되 재료비는 유지해야 한다.
8. 신메뉴를 출시하라: 신메뉴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고객의 평가는 냉정해질 것이다. 공동으로 신메뉴를 출시해 이를 보완하는 것이 좋다.
9. 멀티플레이어가 되어라: 더 이상 카운터만 지키는 사장이 돼서는 곤란하다. 주방부터 홀, 카운터, 배달, 청소까지 사장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10. 유사 매장 방문을 통해 감을 익혀라: 가맹사업을 고객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맛이나 서비스도 트렌드에 따라 조금씩 변화가 필요하다. 본사가 부재했다면 다른 매장을 통해 변화를 감지하고 이를 벤치마킹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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