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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못난 발가락 감추고 싶어요” 발레리나 강수진




사람들은 제게 ‘얼마나 심심하겠어요?’라고 물어봅니다. 하지만 그 단조로움에 한번도 질려본 적은 없어요. 왜냐하면 오늘 하루 살고 난 뒤 내일 깨어나면, 제 자신이 달라지니까요. 시간 속에서 사람은 똑같을 수가 없잖아요. 같은 작품을 오늘 공연하고 내일 공연해도 똑같이 느낄 수 없는 게 사람이지요. 그게 재미있는 거예요.”

아침에 깨어나 집에서 두시간 연습하고, 그런 뒤 걸어서 8분쯤 떨어진 극장으로 출근해 오후 6시반까지 계속 연습한다. 공연이 있는 날은 밤 11시까지 춤춘다. 몸으로 움직이는 동작만 연습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는 종일 여기에 매여있다.

그 삶이 얼마나 단조로운 행위의 반복인지를 내가 알려주려 했을 때,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40)씨는 “내게는 매일매일 새로운 날”이라고 반박했던 것이다. 인터뷰 내내 그녀는 상체를 꼿꼿이 펴고 있었다.




“매일 이뤄지는 꾸준한 집중력이 공연 무대에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죠. 무대에 올라서면서 곧바로 집중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에요. 몸 근육이 저절로 움직이도록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사람이기 때문에 힘들고 몸이 아플 때는 당연히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지요. 그만두고 싶어서 몇 년간 헤맨 적은 있지만. 그러나 결국 그만두지 못했어요.”

―왜 그만두지 못했나요?

“너무 사랑하니까 그만두지 못 하겠더라고요. 그만큼 제가 발레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컸겠죠.”

―어렸을 때 다른 삶을 선택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기 회는 굉장히 많았어요. 배울 것은 다 배웠어요. 음악도 배우고 미술도 배우고 성악도 배우고 한국무용도 배우고, 그런 뒤 마지막 선택한 게 발레였죠. 느낌이 달랐어요. 피아노를 6년간 배웠는데, 틈만 나면 교습에 빠지려고 했거든요. 엄마는 제가 싫어하는 걸 강요하지는 않았어요. ‘꼭 해라’는 식의 말은 한마디도 안 했지요.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요. 언니와 여동생은 하프를 전공했죠. 남동생에게도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누나 세 명이 모두 띵깡띵깡 거리는 예술로 빠지는 것에 질렸는지 건축을 전공했어요. 남동생만 여기 한국 부모님 집에 있어요.”

―솔직히 다른 걸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해봤어요. 그런데 재미없더라고요. 그러니까 저는 발레를 하라고 태어난 게 맞아요. 다리뼈에 금이 가서 어쩔 수 없이 일 년간 집에서 쉬었을 때 컴퓨터 채팅하는 것을 배웠죠. 저는 집중력이 있어 한번 앉으면 8시간이나 계속 했어요. 그런데 재미없더라고요. 못 배웠던 재봉틀질도 해봤어요. 어느 것도 재미있는 게 없더라고요. 그때 확실히 알았어요. ‘내가 발레를 그렇게 좋아하는구나.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구나’라고 느꼈죠.”

그녀는 올해로 세계적인 명문인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춤춘 지 14년이 됐다. 독일 뷔템부르트 주 정부는 그를 ‘궁정무용수(Kammertanzerin)’로 인증했다. 이를 기념해 한국에서 ‘강수진과 친구들’이라는 초청공연이 있었고, 우리가 만난 날은 공연 일정이 모두 끝난 뒤였다.

발 가락 끝으로 온몸을 세우고 사뿐사뿐 나타날 것이라는 잡념에 잠깐 잠겨있을 때, 그녀는 발 뒤꿈치를 높이 받쳐주는 하이힐을 신은 채 들어왔다. 약간의 팔(八)자걸음으로. 팔다리는 길었고, 온몸에 질긴 근육과 골격만 남겨놓은 것 같았다. 하얀 맨살의 다리에는 멍 흔적이 보였다. 하이힐 위로 드러난 발가락 부위의 뼈마디들은 옹이처럼 맺혀 튀어나와 있었다.

동행한 사진기자가 그 발가락을 찍을 수 있겠느냐고 했을 때, 그녀는 거부했다. 발가락으로 그녀는 더 유명해졌지만, 그녀로부터 “여자니까 아무리 아프고 불편해도 예쁘게 보이려고 하이힐을 신고 다닌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 기형의 발가락은 정작 본인에게는 감추고 싶은 것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1995년 그녀가 퇴근해 탁자에 다리를 올려놓고 쉬고 있는데, 남편이 “피카소 그림 같다”며 카메라를 들이댔다고 한다. 뼈가 뒤틀리고 발가락 마디마디에 굳은살이 박힌 발 사진을 확대해 집안의 벽에 걸어놓았다. 그 뒤 한 방송사가 그녀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그걸 촬영했던 것이다.

―발이 아니라, 금방 남의 눈에 띄는 얼굴이나 팔 부위가 그렇게 됐다면 계속 발레를 했을 까요?

“그 건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걸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과거와 미래 같은 것은 제게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지금 똑바로 하고 있지 않으면, 과거에 좋은 일들이 있었고 나쁜 일들이 있었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죠. 오늘이 중요하죠. 그랬을까, 혹은 어떠했을까라는 가정(假定) 따위는 시간 낭비죠. 그럴 시간이 있다면 하나라도 더 연습하고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게 중요하죠.”

―발가락 끝 위에서 추는 발레란 원래 타고난 신체로 보면 몹시 부자연스런 행위가 아닐까요?

“발 레는 신체와 반대로 가는 거죠. 보통 걸음걸이는 발끝이 앞을 향하지만 우리 스텝은 오리걸음처럼 벌어져서 바깥쪽으로 향하죠. 원래 사람들의 뼈는 안으로 굽는데 저희는 바깥으로 모든 뼈를 돌리면서 해야 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신체에 부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동작하는 것이므로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지요. 이 때문에 발레는 굉장히 고도의 테크닉이죠. 일반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저희는 하고 있고, 해야 하니까요.”

―사람은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야 된다고 배웠는데.

“순리대로 안 가기 때문에 더 특별한 거죠. 왜냐면 순리를 거슬러 부자연스러운 신체조건을 자연스럽게 아름답게 만드니까요. 매일 연습하는 것도 그 부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서인 거죠. 몸은 늘 순리대로 따르고 그쪽으로 굳잖아요. 연습했지만 자고 나면 순리대로 또 굳어요. 그래서 이를 역행하기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거죠. 그러니 맨날 고통이지요. 그 고통 없이는 발레를 못해요. 그렇다면 고통을 즐겨야지요. 그것을 즐기지 못하는 무용수들은 그만둬야 해요. 왜냐하면 그런 고통을 겪어야 언젠가는 발레의 근육이 만들어지니까요.”


 

▲ 남편 툰치 소크만(왼쪽)씨와 강수진



―창조주에 대한 일종의 도전 같군요.

“맞아요. 너무 잘 아시네. 무용하셨어요?”

―이 몸으로도 될까요?

“발레를 아니까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하시죠. 왜냐하면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발레가 왜 당신에게 그렇게 매력적이죠?

“만 약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한다면, 저는 줄리엣의 삶을 한 시간 동안 안무와 음악에 맞춰서 사는 거예요. 지금 이 자리에서는 ‘수진’이지만, 작품에서는 저는 줄리엣으로 슬퍼하기도 기뻐하기도 해요. 제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나오는 거죠. 온몸으로, 몸뿐만 아니라 그 혼(魂)까지 합쳐져서 말입니다.

음악가들은 피아노나 악기, 노래를 통해서 자기표현을 하는데, 발레는 몸이 악기이고 거기에 정신이 함께 어울리니 굉장히 하이 레벨(고급) 예술이죠. 그러니까 사실 너무 힘들죠. 이렇게 온몸으로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걸 표현하니, 공연이 끝나면 엠티 필링(empty feeling: 비워진 느낌) 상태가 돼요. 몸이 아프거나 완전히 부상이 완쾌되지 않았을 때도 공연을 하고 나면 몸이 더 좋아져요.”

―‘엠티 필링’이라고 했는데, 이는 또한 허무함일 수도 있지 않나요?

“아 니오. 스님들이 마음을 비우기 위해 그런 느낌을 받기 위해서 수련하잖아요. 저도 발레를 통해 저 자신을 수련하는 거 같아요. 바깥 일상에서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춤추는 그 몇 시간 동안은 행복해요. 다른 잡념 없이 그 속에 빠져들어 갈 수 있으니까요. 이는 말로 전달할 수 없는 희열감이지요. 일반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지요.”

―살면서 맺힌 것이 많나요?

“아니오. 저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또 운도 좋고. 고통스럽거나 힘들 때도 많았지만, 저는 발레에서 굉장히 행복을 느껴요. 작품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고, 그런 느낌을 관객들에게 느끼게 할 수 있어요. 제 공연을 보고 행복한 사람들이 많거든요. 남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게 저는 기뻐요. 그런데 제가 깨달은 것은, 제가 행복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가 없다는 거지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기분이 울적해질 때는 언제입니까?

“외로울 때죠. 어려서 부모님 곁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굉장히 외로웠어요.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함께 있어도 외롭고 고독했어요. 지금도 그래요. 춤추면서 신체적으로 힘든 것보다, 그냥 말할 수 없는 외로움, 고독감, 그게 굉장히 힘든 것 같아요. 사람 사는 것의 일회성도 생각하죠. TV에서 싸우고 죽이고 굶주리는 사람들의 뉴스를 보면서 어떨 때는 저도 모르게 울어요. 우리 삶은 한번 살다 가는 것이잖아요. 그 한 번도 이렇게 힘들잖아요. 어쨌든 저는 후회 없이 열심히 살고 싶어요.”

―예술가는 태어나는 겁니까.

“제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아요. 보통 사람들과 다른 무엇이 없으면 그 자신이 힘들어요.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요. 예술의 삶이란 일직선으로 가지 않으면 이뤄질 수가 없어요.”

―예술가는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고들 하지요?

“그 건 맞아요. 이기주의적이라고 해도 살아온 삶의 경험으로 균형을 맞춰나가죠. 운 좋게도 신랑을 잘 만났어요. 신랑은 무용수였거든요. 그래서 제 삶을 아주 잘 이해해줘요. 집에 들어오면 신랑과 이야기 하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어요. 남편이 다 받아 줍니다. 우리는 24시간 같이 붙어 있어도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해요. 저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몸으로 표현도 많이 하니까, 병에 걸릴 수 없죠. 이런 남편을 만났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저는 운 좋은 여자예요.”

―대놓고 남편 자랑을 너무 하는 것 같네요.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는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다른 찬사의 낱말이 있으면 그것을 사용했을 거예요. 제가 운이 좋은 여자죠.”

―무대에 섰을 때의 심리상태는 어떻습니까?

“어 느 공연이든지 약간의 떨림은 있어야 해요. 떨림이 없으면 그것도 공연에 안 좋아요. 그러나 너무 떨면 실수가 많고 너무 편안하게도 할 수 없고. 그것을 잘 조절해야 해요. 관객들은 무용수의 현란하고 복잡한 동작에 빠지지요. 하지만 춤추는 입장에서는 가장 단순한 동작이 더 힘들어요. 왜냐하면 현란한 동작은 조금 실수해도 보완되지만, 단순한 것은 조금만 실수해도 금방 눈에 띄어요. 단순한 동작을 잘한다는 것이 세월이 갈수록 어렵다는 걸 느끼죠.”

―음식은 가립니까?

“25살이 지나면서 가릴 필요가 없어졌어요. 물만 마셔도 살찌는 때도 있었죠. 그 시절에는 다이어트를 해도 너무 힘들었어요. 무용하는 사람이 살이 쪄 몸은 무겁고. 그런데 25살이 지나고 연습량이 많으니까, 안 먹으면 제가 못 견뎌요. 신랑보다 제가 더 많이 먹어요. 아마 안 믿으려고 할지 모르나, 먹지 않았으면 제가 지금 40세에 이렇게 무용을 못 하고 있었을 거예요.

야 채와 생선을 좋아해요. 무용은 몸으로 하는 거니까, 에너지를 얻기 위해 흰살, 닭고기류를 먹지요. 몸뿐만이 아니라 혼(魂)한테도 음식을 줘야 되잖아요. 빨간 고기인 갈비는 한국에 올 때만 먹어요. 제가 갈비 양념을 좋아해서요. 신랑이 음식 만드는 것을 너무 좋아해 저는 그냥 먹기만 하면 돼요. 부부 다툼이 있다면, 신랑이 저를 부엌에 못 들어오게 하거나 제가 도와주고 싶어도 신랑이 혼자서 음식을 만들겠다고 할 때죠.”

―술은 안 마십니까?

“저녁 식탁에는 레드 와인을 한두 잔 하죠. 한번은 한국에서‘갈라’(Gala: 중요 장면만 뽑아 보여주는 공연)가 끝나고, 어느 스텝이 ‘이것은 꼭 마셔봐야 한다’며 맥주와 무엇을 섞은 거래요. 그것을 한꺼번에 마셔야 된다고. 무용하는 친구들이 약간 크레이지한 면이 있잖아요. 공연이 끝난 직후 허한 상태에서 술이 들어가면 확 돌잖아요. 그런데 마셔보니 굉장히 밋밋하더라고요. 애들이 다 마셨어요. 두 번째 잔을 마시고 나니 조금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일어서려고 했는데 못 일어섰어요. 그날 폭탄주가 뭔지 알았어요.”

―언젠가는 춤을 못 추게 되겠지요?

“무 용수들은 어느 다른 예술보다 생이 짧잖아요. 몸으로 하는 것이니까요. 언젠가는 그만두겠죠. 저는 제 몸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따라와줄 때까지만 할 거예요. 지금은 예전보다 몸 상태가 훨씬 더 좋아요. 제게는 절정기인 것 같아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모르죠. 최고의 표현을 해낼 수 없는 몸 상태가 왔다고 생각되면 결정하겠지요. 그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죠. 다만 오늘 열심히 연습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죠. 어제보다 오늘 더 좋은 공연을 할 수 있는 데 전력하는 것이죠.”

마주 보며 들을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녹음된 그녀의 말을 풀어보니, 문장으로 제대로 완결되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14살 때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서 유학했다. 그 뒤로 쭉 한국을 떠나 있었다. 머문 시간보다 떠나 지냈던 시간들이 갑절이 된 셈이다.

―2000년에 다리 정강이뼈에 금이 가서 일 년간 춤을 멈췄을 때는 어땠나요?

“1999 년 발레의 오스카상이라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여성무용수상을 받고 제일 잘 나갈 때,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원할 때, 여러 발레단이 저를 다 끌어가려고 할 때, 제가 부상으로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다리뼈에 금이 갔는데도 참고서 계속 춤을 춰왔기 때문이죠. 발레가 힘들어 그만 포기하고 싶은 적이 많았지만, 그렇게 끝나니 정말 슬펐어요.

부상이 회복되자 다시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쉬는 기간 동안 제 몸의 근육은 이미 평범한 보통 사람의 것으로 돌아가 있었어요.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이때가 훨씬 더 힘들었어요. 다시 시작은 했지만, 내가 왜 이 힘든 길로 되돌아가야 하느냐는 갈등과 싸웠지요. 부상을 심하게 당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예전보다 발레가 더 좋고 제가 하는 모든 일이 소중해졌어요.”

그런 뒤 “삶에서 좌절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나 봐요. 만약 그때 부상이 없어서 계속 해왔다면 지금쯤 무용을 그만뒀을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고마운 일이었어요”라고 덧붙였다.

몸에서 뼈와 근육만 남겨놓은 줄 알았던 그녀와 작별 악수를 하는데, 손바닥의 살은 말랑했다.


강수진은…

선화예중에서 발레를 전공했고,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로 유학했다.

1985년 동양인 최초로 로잔 국제발레 콩쿠르 1위를 했다.

1986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최연소(19세)로 입단했다.

이 세계적인 발레단은 1년 공연횟수만 150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 ‘로미오와 줄리엣’에 처음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1999년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여성무용수상을 받았다.

2002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종신회원이 됐으며, 그해

무대매니저인 툰치 소크만(47)과 결혼했다.

집안에서는 터키인 남편과 영어로 대화하지만, 침대에서는

부모가 부쳐준 한국책을 여전히 읽는다고 했다.

미모와 늘씬한 체격의 그녀는 명품 페라가모의

패션모델로 선 적도 있었다.

2007년 독일 뷔템부르크 주 정부의 궁정무용수로 공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