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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_경제

은행이 망하면 왜 세금으로 살리는 것일까

영국 정부가 18일 파산 위기에 놓인 모기지 은행 노던록을 국유화하기로 결정했다. 노던록은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에 연계된 파생상품에 투자했다가 대규모 손실을 입은 바 있다. 지난해 9월 정부의 긴급 지원을 받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량 인출 사태가 벌어졌고 사태의 확산을 우려한 영국 정부가 전액 지급 보증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 래도 금융 불안이 진정되지 않자 영국 정부는 추가 자금 투입이나 민간 업체 매각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국유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미 천문학적인 규모의 공적 자금이 투입된 상황이고 민간 매각은 오히려 혈세를 낭비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잠정적이지만 일단 정부가 위험을 떠안고 금융 불안을 잠재우겠다는 결정인 셈이다.

신자유주의의 첨병이라 일컬어지는 영국 정부의 다분히 반시장적인 조치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금융 불안이 심각하다는 반증이면서 어느 나라든 금융 불안의 최후의 보루가 정부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시장 참가자들은 늘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시장 자율에 맡겨 두라고 요구하지만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것은 결국 정부의 몫이다.

IMF 이후 한국 정부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공적 자금이 투입된 제일은행과 한미은행, 외환은행 등을 외국 자본 유치라는 명목으로 헐값에 팔아 넘겼다. 대부분의 은행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손에 넘어갔고 금융 공공성이라는 개념도 함께 실종됐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어떤 은행이 다시 파산위기에 직면한다면 이명박 정부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정부 규모를 축소하고, 감세에 규제 완화에,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국유화라는 말이 도대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영국 정부는 어쩌자고 망해가는 은행을 세금을 쏟아 부어 살린 것도 부족해 국유화까지 시켰을까. 당장 주식을 강제 수용 당하게 된 노던록의 주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더타임즈에 따르면 노던록의 한 주주는 "정부가 주주들의 몫을 강탈해 갔다"면서 "금융 허브로서의 영국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면서 거세게 분개했다. 주주들은 영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불사한다는 입장이지만 아직 정확한 보상 조건이 나오지 않아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상태다.

이와 관련, 노던록의 주주와 영국 국민들(납세자들)의 갈등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만약 노던록을 민간에 매각했으면 주주들이 환영했을 것이다. 금융 불안이 해소되고 회사가 정상화되고 다시 주가가 오를 가능성이 그나마 남아있으니까. 그러나 이 경우 천문학적인 규모의 공적 자금은 회수할 방법이 없다. 결국 세금을 털어 주주들을 돕는 결과가 된다.

국유화하는 경우도 갈등이 많다. 영국 정부는 공적 자금을 제외하고 장부가를 다시 평가해서 주식 가치를 산정한다는 계획이다. 공적 자금 규모가 워낙 커서 주주들에게 돌아갈 몫은 거의 없다. 게다가 국유화를 한다고 해도 노던록이 다시 살아날 거라는 확신도 없다. 정부 차원에서 금융 불안의 위험을 떠안고 국민들이 그 부담을 짊어지는 셈이다.

더타임즈는 "왜 정부가 망한 은행에 투자해야 하느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수상은 이와 관련, "납세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추가 부실을 막는 게 최대의 관건이었다"면서 "노던록에 관심을 보이는 은행이 몇 군데 있었지만 당분간은 정부 소유로 남겨두고 정상화시킨 뒤 매각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더타임즈는 그러나 "국유화에 소요될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다 정치적으로도 거의 재앙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경영 정상화를 위해서는 노던록의 자산 일부를 매각해야 할 텐데 현재 시장 상황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더타임즈는 "노던록을 망하도록 내버려두면 적어도 세금은 더 안 들어갈 것 아니냐"는 입장이다.

그러나 파이낸셜타임즈의 논조는 조금 다르다. 이 신문은 "노던록이 정부의 관리 아래 더 나은 실적을 올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는 없다"면서도 "노던록의 국유화 결정은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문제는 이런 결정이 5개월이나 늦어졌다는데 있다"고 지적했다. 늘 시장의 논리를 대변해 왔던 이 신문의 입장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바다 건너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하다. "영국 정부는 이제 정치인들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은 몇 가지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주주들에게 빈손으로 떠나라고 명령해야 하고 모기지를 받은 몇몇 가난한 사람들을 집에서 내쫓아야 하고 자부심 강한 노던록의 직원들을 절반 가까이 해고해야 할 것이다."

은행은 신용을 창출할 수 있도록 허용돼 있다. 자기자본비율이 8%인 경우, 자기자본의 최대 13배까지 대출을 내주고 이자를 받을 수 있다. 1조원의 자기자본으로 13조원을 빌려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은행은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충실히 복무하지만 그러다가 은행이 망하면 정부가 세금을 쏟아부어 살려낸다. 은행이 망할 경우 그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노던록의 국유화 결정은 경제 전반에 미치는 피해를 줄이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지만 금융기관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 그리고 최소한의 적절한 감시와 규제의 필요성을 다시 고민하게 한다. 국내 대부분 언론이 노던록 국유화 소식을 비중있게 전했지만 정작 그 의미를 제대로 짚는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이정환 닷컴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