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오마이뉴스
목표는 현대판 십승지 구현…자연·생명서 행복 찾길
21세기 사하촌 일구는 마곡사 주지 원혜 스님
다향(茶香)이 은은한 방에서 탱화를 배경으로 원혜 스님이 동자승 같은 미소를 짓고 있다. 마곡사는 빼어난 화승(畵僧)을 많이 배출한 불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요즘 충남 공주 마곡사에 가면 몇몇 이상주의자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이 꾸는 꿈은 들에서는 농약을 쓰지 않고, 집에서는 석유를 쓰지 않아도 지속적인 자립자영이 가능한 자연 속의 마을을 세우는 것이다.
지난 2월 몇몇 신문들이 이 소식을 짤막하게 전했다. 마곡사가 귀농귀촌인들과 협약을 맺고 유기농마을공동체를 절 아래에 만들 계획이라고. ‘사찰은 노는 땅을 농부들에게 제공하고, 농부들은 그 땅에 친환경 생태 농사를 지어 사찰이 주도하는 생협을 통해 판로를 확보해, 인근 주민들에게는 바른 먹거리를 제공하고, 생산자들은 자립자치가 가능한 마을공동체를 이룩한다.’ 이것이 누군가가 ‘21세기 사하촌 프로젝트’라고 명명했다는 꿈의 실체이다.
불교계 초유의 일이자, 사찰 주도의 농촌마을 부흥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 사람은 마곡사 주지 원혜 스님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마곡사를 찾아갔다. 마곡사는 <정감록> 이래 여러 비결들이 꼽는 10승지 중 하나다. 절 주변은 난을 피해 찾아든 사람들이 사하촌을 이루며 살던 곳이다. 이제 그 땅에 오염된 공기와 물을 벗어나 살고 싶은 사람들이 새롭게 마을을 이루려 하고 있다. 과연 10승지의 비결이 마침내 실현되는 것일까?
-이곳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아래가 전란과 병란도 피해 간다는 10승지의 하나라더니, 절의 기운이 참 안온합니다.
“절 아래 샘골이 정감록이 말한 유구마곡지간(維鳩麻谷兩水之間 可活千人之命)이라고 합디다. 우리가 생태마을공동체를 세우려는 바로 그곳이지요. 예부터 마곡사엔 아흔아홉 암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수행자와 구도자들이 깃들었으니 길지(吉地)이긴 길지인가 봅니다.”
공주 지방의 천년도량 마곡사는 봄의 사찰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 하여 마곡의 봄 경치를 으뜸으로 쳤다. 땅기운이 따뜻하여 겨울에도 개울이 쉬 얼지 않고 한여름에는 흙이 아궁이처럼 뜨거워 풀뿌리가 녹을 정도라고 하니, 봄이 오는 이맘때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따스하고 안온할밖에.
마곡사는 예부터 많은 수행자 깃든 길지
사찰 땅 장기임대…귀농인 들여 유기농사
불교계 최초 자립·자치 공동체운동으로
다승(茶僧)으로도 이름이 높은 원혜 스님이 내놓은 차를 마시며 마곡사의 유래를 들었다. 마곡사 아래 샘골에는 한때 1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마곡사 땅을 부치며 살았다고 한다. 마곡사 경내에는 지금도 절 땅을 부치던 소작인들이 도지세로 바친 쌀을 보관하던 창고가 보존돼 있다. 백범이 일경의 추격을 피해 숨어든 곳도 이곳. 마곡사에서 ‘21세기 사하촌’이 건설되려는 것이 결코 우연만은 아닌 듯싶은 사연들이다.
“내가 마곡사 주지로 온 뒤 바로 그 일을 시작해보려 했는데, 문제는 농촌에 노인들밖에 없어요. 생태유기농마을을 만들려 해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생각한 게 귀농귀촌인들을 이곳으로 받아들이는 거였습니다. 생태적 삶과 농업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더욱이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불교도들이라면 저의 취지에 공감하리라 여겼습니다.”
원혜 스님의 이런 생각에 의기투합한 것은 봉은사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공동체운동가 박승옥씨였다. 절은 경작지를 제공하고 귀농귀촌인들이 유기농사를 짓는 생태공동체 마을을 꾸리자는 그림이 그려졌다. 마곡사 종무실장인 남태규씨가 실무를 맡았다. 지난 1월 마곡사, 전국귀농운동본부, 두레배움터가 3자 협약을 맺고 본격적인 ‘십승지 소농 마을공동체’ 건설에 나선 것이다.
원혜 스님이 마곡사 인근 땅에 유기농업 가능성을 본 것은 주지 취임 직후 휴경지에 농장을 만들면서였다. 3000평의 땅을 개간해 배추와 무를 심었는데 지기가 좋아서인지 비료와 농약이 필요없었다는 것이다.
-‘마곡사람들’ 협동조합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마곡사람들 협동조합은 유기농 약초 농사와 논농사, 밭농사를 짓는 자립자치 지역공동체 운동을 목표로 합니다. 사찰은 경작지를 제공하고, 농부들은 유기농산물을 생산합니다. 생산물은 마곡사를 통해 인근 공주 지역 등에 판매되는 시스템입니다. 마곡사가 장기임대 형식으로 제공한 땅은 오로지 농사용으로만 사용되며 다른 목적으로는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 있지요.”
사찰이 땅을 농부에게 장기임대 형식으로 제공하고 유기농 약초 생산협동조합과 소비자 생활협동조합을 직접 조직한 것은 조계종 사상 최초로 알려져 있다. 현재 마곡사의 생태마을 조성 취지에 공감한 20여가구가 마을 입주를 신청한 상태라고 한다. 애초 협동조합을 만들 때 발기인도 20여명이었으니, 입주 신청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사찰이 소유한 땅을 일반인에게 제공하는 것에 대해 조계종단 차원에서 문제는 없습니까?
“농지 제공은 전혀 문제가 없는데, 집을 짓는 대지는 조금 논란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지상권이 발생할 소지가 있어서 나중에 분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총무원의 우려입니다. 조계종 종법에는 어떤 식으로든 지상권이 발생할 소지가 있는 건축물은 원천적으로 신축 불가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마곡사 소유 땅 안의 샘골마을 사유지를 협동조합 명의로 매입해 주택 부지를 확보할 생각입니다. 실무자들의 얘기를 들으면 4월 중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보고 있습니다.”
경작지와 부지를 장기임대 또는 협동조합 소유로 확보하려는 것은 귀농귀촌인들이 토지를 직접 소유하게 될 때 발생하는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농업정착을 목표로 한 마을공동체가 나중에 땅값이 몇배씩 뛰면서 본래의 취지가 흐려지는 사례가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여기서 귀농마을을 한다고 하니까 투기꾼들이 원주민들을 부추겨요. 하지만 마곡사 일대 땅은 대부분 마곡사 소유라 마곡사 허락 없이는 함부로 집을 짓지 못한다는 점을 알았으면 합니다.”(남태규 종무실장)
-이야기를 스님 얘기로 돌려볼까요? 출가 인연도 궁금합니다.
“나는 딱히 인연이라고 내세울 게 없습니다. 그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부끄럽게도 어느날부턴가 수행자 흉내를 내고 있더군요.”
그는 어려서부터 학교의 배움보다는 성당이나 교회에 가서 노는 게 좋았다고 한다. 부모님이 다니던 성당(진주 문산성당)에서 교리공부를 하거나 연극을 하는 게 더 재미있었다. 정규교육은 중학교가 끝이었다.
“그나마 중학교는 친구들이 가니까 나도 가야 하나 보다 싶어서 가긴 했는데, 고등학교는 영 마음이 가지 않았어요. 솔직히 공부가 하나도 재미없었어요.”
-조숙했나 봅니다.
“성경은 어려울 것 없이 듣고 있으면 되었고, <반야심경>은 어려워 아예 이해를 못할 때, 내 눈에 띈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4·19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에 관한 책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책이 나한테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아, 세상에는 이런 세계, 이런 사람이 있구나 싶어 가슴이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종교체험을 시작한 원혜는 19살 때 고향과 멀리 떨어진 공주 마곡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절은 철 따라 소풍 가는 아름다운 숲 속의 집인 줄만 알았던 그였던지라, 머리만 깎았을 뿐 “절방에서 하는 말은 도통 무슨 소린지 몰랐다”고 한다. 그가 인생공부를 하겠다며 절에 들어와 비로소 공부다운 공부를 시작한 것은 범어사 강원에 들어가서였다. 강원에서는 졸업할 때 강원 원장상을 받았을 만큼 열심이었다고 한다.
김주열 열사 책에 영향…19살때 사미계
위장 취업해 포교활동, 정말 신나던 시절
봉은사서 유기농 공부·나눔문화 첫걸음
“강원을 마치고는 여러 수행처를 돌다가 몇몇 도반들과 마곡사에 돌아와 철운 조종현(1906~1989) 선생을 모시고 공부를 하기도 했지요.” 철운은 소설가 조정래씨의 부친으로 당시 불교학계에서는 손꼽히는 대강백이었다.
-80년대에는 민중불교 운동에도 열심이었지요?
“중앙승가대학이 있던 안암동 개운사에 있을때 데모하던 고대생들이 쫓겨들어오면 절문을 싹 닫아걸었어요. 경찰이 못 쫓아오게. 허허. 그런 일들을 겪으며 나도 모르게 시대의 아픔에 동참을 하게 됐나 봅니다.”
학생들이 분신을 해가며 독재체제에 저항하는 것을 보며 사회의식에 눈을 뜬 또래의 다른 승려들과 함께 원혜도 자신의 시대정신을 찾아 나섰다.
“그때 참 고민이 많았어요. 과연 종교인으로서 나의 길은 무엇인가 하는. 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라는 불교학생모임에 나가 학생들에게 불교 얘기를 해주다 보니 어느새 그들과 함께 이런저런 세상공부를 하게 되더라구요.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이 가장 책도 많이 읽고, 불교 공부도 열심히 한 것 같아요.”
-노동현장에 직접 위장취업까지 했다는데?
“세상공부를 하다 보니 문득 내가 몸으로 겪어봐야 대중들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뭔지 모를 뜨거운 불길 같은 것이 내 안에서 솟구치는 걸 느끼기도 했고. 막연하나마 불교의 대중화에 내 한 몸 던지는 일을 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더욱 찜찜해지는 거예요. 말과 행동의 불일치… 아마도 그런 기분을 걷어내려 했던 것 같고, 이념적으로 뭔가 뚜렷이 정립돼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원혜는 중의 신분을 감추고 경기도 성남과 부천 등지에서 프레스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밤에는 포교당을 열어 학생과 노동자, 일반시민을 상대로 포교활동을 벌였다.
“위장취업 대학생이나 먼저 와 있던 스님들과 함께 포교당을 했어요. 낮에는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포교당에 모여 공부를 하는 생활이었는데 아무리 철야를 하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해도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요. 정말 신이 나던 시절이었지요. 노동자들과 어울리기 위해 못 마시는 막걸리도 한잔씩 했어요.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한 잔 이상은 먹지 못했는데, 그래도 철야 근무를 하려면 막걸리 한두 잔 정도는 마셔둬야 잘 버틸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지요. 그런 게 진짜 공부였지요….”
원혜는 1990년대 초반 조계종 개혁이 이뤄지면서 사회운동에서 생태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세속 일은 세속에 맡기고, 생명운동을 통해 부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승려의 역할일 것 같아서였다. 그가 본격적인 생태유기농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봉은사 살림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1990년에 가서 1998년에 주지가 되었는데, 거기서 생태에너지 활용과 유기농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 생활협동조합 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지리산 실상사의 도법 스님 등과 도농공동체 운동인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운동을 시작한 것도 그 무렵입니다.”
불교사찰에 ‘아름다운가게’를 유치해 나눔 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였다.
“당시 일면식도 없던 박원순씨한테 전화를 먼저 했어요. 그때는 서울 강남지역에서는 나눔이나 기부활동에 그리 관심이 높지 않았는데, 봉은사의 아름다운가게를 통해 많이 확산되고 정착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런 봉은사에서의 체험이 마곡사 공동체마을의 모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생명을 사랑하는 종교와 사람들의 구체적인 만남이라는 점에서 이번 ‘21세기 사하촌 프로젝트’가 꼭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목표하는 것도 현대판 10승지의 구현입니다. 지금 시대는 부처나 예수에게 빌지 않아도 100살까지 사는 세상 아닙니까? 전란도 병란도 없는 시대라지만 그 긴 삶을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느냐? 그 해답을 어디서 찾을까요? 자연과 함께, 생명과 함께하는 청정한 삶에서 대답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저도 힘껏 돕겠습니다.”
원혜 스님은
불교계 생태농업·공동체 운동의 선구자
조계종 충남지역 본사인 마곡사 주지이다. 조계종 승려 가운데 일찍이 생태농업과 공동체 운동을 펼쳐온 사람 중 하나이다.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서울의 강남지역 대형 사찰인 봉은사 주지를 맡아 불교 안에 바른 먹거리 운동을 펼쳤고 아름다운가게를 유치해 나눔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1954년 경남 진주에서 나 1973년 마곡사에서 출가해 1978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비구가 됐다.
80년대 초반 사회의식에 눈떠 공장노동자로 ‘위장취업’해 대중들의 삶을 체험하면서 노동자와 학생, 시민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폈다. 봉은사 주지직을 명진 스님에게 물려준 뒤 2009년 주지들이 비리 혐의로 잇따라 구속된 마곡사 주지에 선출돼 마곡사를 새로운 수행사찰로 탈바꿈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나눔과 생태 사찰을 표방하면서 최근 마곡사 소유 땅 200여만평을 귀농귀촌인들에게 장기임대 형식으로 내놓는 협약을 맺고 유기농 약초와 농산물을 생산하는 생태마을 조성에 나섰다. 종교기관이 일반 대중에게 논밭과 집터를 무상으로 장기임대해 친환경 생태농업이 뿌리내리도록 기반을 제공한 것은 불교계뿐 아니라 우리나라 종교계 전체로도 극히 드문 일이다.
특히 종교기관이 소유하고 있는 방대한 땅을 친환경 및 친농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험대가 되는 것이어서 종교계뿐 아니라 친환경 생태운동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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