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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살이

나무이야기

나무이야기

' 이름없는 들꽃, 이름없는 나무'. 주변에서 흔히 보는 토종 식물을 우리 는 흔히 이렇게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 들꽃과 나무에겐 모두 이름이 있 다. 단지 우리가 그 이름을 모를 뿐이다. 나무의 이름과 용도도 모른 채 나무를 사랑하고 자연과 국토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영남일보는 우리나라의 산과 들에 자생하는 각종 나무 100여종을 선정, 국내 임산공학 분야의 대가인 경북대 박상진 교수(임산공학과)의 해설로 그 나무의 특징과 쓰임새, 얽힌 이야기 등을 연재한다. 우리의 산하와 자 연이 새롭고 중요한 의미로 독자에게 가깝게 다가가는 계기가 될것으로 기 대한다.

편집자 주



초피나무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면 여름 내내 살이 오른 미꾸라지를 푹 고아 만든 추어탕의 감칠 맛을 잊지 못한다. 문제는 비린내. 전라도 쪽에서는 된장을 풀고 경상도에서는 초피(조피, 제피, 쟁피, 죄피) 가루를 넣어 해결한다.

그 래서 고즈넉한 시골동네의 밭둑에는 한두 그루의 초피나무가 심겨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가을에 종자를 따다가 절구로 빻아서 쓰며 까만 알갱 이보다는 종자 껍데기에 향기가 더 있다. 깜박 초피가루 준비를 잊어버린 아낙은 잎사귀를 듬성듬성 썰어 넣어도 비린내를 없애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초피나무는 조피나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산초나무가 이 와 비슷해서사람들은 흔히 혼동한다. 그러나 추어탕에 넣을 셈이라면 산 초나무 열매로는 톡 쏘는 독특한 맛을 얻지 못한다.

산 초나무에도 향기가 있으나 초피나무보다 훨씬 약하여 향신료로 쓸 때 는 역시 초피나무라야 한다. 초피를 추어탕에 쓰는 것은 주로 경상도 지방 이므로 산에서는 임금님 만나기 보다 어렵다. 반대로 전라도나 충청도 쪽 으로 가면 초피나무가 오히려 더 많다.

어 떻게 구분할까? 조금만 주의깊게 보면 금세 찾아낼 수 있다. 우선 초 피나무는 가시가 서로 마주나고 잎이 동그스름하며 가장자리가 잔잔한 물 결모양이다. 이에 비하여 산초나무는 가시가 어긋나며 잎은 끝이 뾰족해지 면서 길쭉하고 가장자리는 톱니모양을 하고 있다.

간단하게 구별해 가시가 마주나면 초피나무, 어긋나면 산초나무로 보면 된다. 초피나 산초는 가지 끝마다 한꺼번에 수 십 개씩 달리므로 다산(多 産)의 의미를 갖는다. 중국에서는 왕비의 거실을 초방(椒房)이라 하였으며 연산군이 궁녀를 자꾸 맞아들여 말썽이 나자 아부 잘하는 신하가 '산초 열 매가 번성하여 되에 가득하다는 말이 있다'고 임금의 후궁 맞이를 옹호하 였다.

한방에서는 건위제, 구충제, 염증약, 이뇨제 등으로 널리 사용한다. 또 최근에는 초피에서 O-157를 비롯한 비브리오균을 억제하는 효과가 밝혀지 고 있어 더더욱 우리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물푸레나무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란 뜻으로 물푸레나무라고 불린다. 실제로 가지를 꺾어 하얀 종이컵에 맑은 물을 받아 살그머니 담가보면 가을 하늘이 연상 되는 맑고 파란 물이 우러난다.

동 의보감에는 물푸레나무 껍질을 진피(秦皮)라 하여 눈병 약으로 쓰고 있는데 '두 눈에 핏발이 서고 부으면서 아픈 것과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계속 흐르는 것을 낫게 한다. 우려내어 눈을 씻으면 정기를 보하고 눈을 밝게 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 이 나무는 질기고 휨이 좋아 도리깨 등의 농사용 도구에 쓰였고 옛 서당의 훈장은 물푸레나무나 싸리나무 회초리로 아이들의 게으름을 다스렸 으며, 죄인을 신문할 때 몽둥이로도 사용한 기록도 있다.

조 선왕조 예종때 형조판서 강희맹이 임금께 올린 글에는'지금 사용하는 몽둥이는 그 크기가 너무 작아 죄인이 참으면서 조금도 사실을 자백하지 않으니, 이제부터 버드나무나가죽나무를 없애고, 단지 물푸레나무만을 사 용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있다.

눈 이 많이 오는 강원도의 산간지방에서는 눈 속에 빠지지 않은 덧신으로 서 설피를 만들어 쓰는 재료이기도 했다. 서민에게는 관청에 불려가 매맞 을 때도, 고달픈 삶을 이으려 눈 위를 오갈 때도 애환을 함께 한 나무가 물푸레나무이었다.

오늘날에는 통쾌한 홈런을 날리는 이승엽의 야구방망이, 테니스채 등 운 동구 재료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

우 리나라의 어디를 가나 산 속의 작은 개울가에 아름드리로 자라는 큰 나무이다. 달걀모양으로 생긴 잎이 하나의 잎자루에 대여섯 개가 붙어있으 며 서로 마주난다. 열매는 길이나 너비가 싸인펜 뚜껑만 한데 주걱모양으 로 날개가 붙어있고 한꺼번에 수십개씩 무더기로 달린다.

비슷한 나무에 들메나무가 있으며, 쓰임새는 거의 같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붉나무 (鹽膚木,木鹽,五倍子樹)


나무이름은 붉은 단풍이 드는 나무란 뜻으로 붉나무가 되었다. 단풍이라 면 단풍나무만 연상하지만 곱게 물든 붉나무의 단풍을 한번만 보면 왜 이 름을 붉나무라고 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만큼 그 진한 붉음이 우리를 감탄 케 하는 나무이다.

개화 이전의 우리네 서민들의 풍물을 그린 글에는 소금장수 이야기가 빠 지지 않는다. 그 만큼 소금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생필품이었으며, 특히 산골에 사는 사람들은 어쩌다가 나타나는 소금장수 한테서 잊지 않고 소금을 확보해 두어야만 하였다.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 봉상왕의 조카 을불(乙弗)은 왕의 미움을 받아 소금장수로 떠돌아다니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왕을 몰아내고 15대 미천왕(300~336)이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남아있는 가장 오랜 소금장수 이야기이고 가장 출세한 소금장수이다. 그 만큼 옛날 소금장수는 없어서는 안될 '귀하신 몸'이었으며, 특히 더벅머리 총각 소금장수는 시골처녀들을 가슴설레게 하였다 한다.

그런데 가진 소금은 바닥나고 소금장수도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였을 까? 바닷물을 정제한 소금을 구할 수 없을 때 대용으로 염분을 구하려는 우리 선조 들의 노력은 정말 눈물겨웠다. 특정의 벌레에서 염분을 얻는 충 염(蟲鹽), 신나물을 뜯어 독 속에 재어두어서 얻는 초염(草鹽), 쇠똥이나 말똥을 주워 다가 이를 태워서 얻는 분염(糞鹽) 등 이름만 들어도 소금을 얻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붉나무 열매에서 소금을 얻는 것이 가장 간편하고 효율적이었다. 붉나무 열매는 가운데에 단단한 씨가 있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과육에 해당하는 부분이 가을이 깊어 갈수록 소금을 발라놓은 것처럼 하얗게 된다. 여기에는 제법 짠맛이 날 정도로 소금기가 들어 있는데 긁어모아두면 훌 륭한 소금대용품이 된다. 한자로 염부목 혹은 목염이라 하는 것은 붉나무 의 열매가 소금으로 쓰인 것을 나타낸다.

또 붉나무에는 오배자(五倍子)라는벌레 혹이 달리는 데 타닌을 50-70% 나 함유하고 있으며, 가죽 가공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원인 동시에 약 제였다. 붉나무에 기생하는 오배자 진딧물이 알을 낳기 위하여 잎에 상처 를 내면 그 부근의 세포가 이상분열을 하여 혹 같은 주머니가 생기고 오배 자 진딧물의 유충은 그 속에서 자라게 되는데 이 주머니를 오배자라 한다.

동의보감에 보면 오배자 속의 벌레를 긁어 버리고 끓은 물에 씻어서 사 용하는데, 피부가 헐거나 버짐이 생겨 가렵고 고름 또는 진물이 흐르는 것 을 낫게 하며 어린이의 얼굴에 생긴 종기, 어른의 입안이 헌 것 등을 치료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에는 토산물로서 붉나무 벌레 혹을 생산하는 지 역이 원주, 평창, 양양, 정선, 강릉이라 하여 약제로 널리 쓰였음을 짐작 케 한다.

오늘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한낱 평범한 붉나무도 한때 사랑을 독차지하였던 영광의 세월을 말없이 되뇌어 보고 속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높지 않은 산자락의 양지 바른쪽이면 우리나라 어디에나 잘 자란 다.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나무로서 크게 자랐을 때는 지름이 10여cm에 이 르기도 한다. 잎은 어긋나 달리는 데 하나의 잎자루에 7-13개의 작은 잎 이 서로 마주 보면서 붙어있다. 잎자루의 좌우에는 좁다란 날개가 붙어 있 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혼동하는 옻나무나 개옻나무는 잎자루에 이런 날개가 없으므로 조 금만 관심 있게 보면 금세 구분할 수 있다. 작은 잎은 타원형이며 끝이 차 츰 뾰족해지고 가장자리에 드문드문 톱니가 있다. 꽃은 암수 다른 나무이 고 가지의 꼭대기에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달리고 8월에서 9월에 걸쳐 연한 노랑 빛의 꽃이 핀다. 꽃이 지면 속에 단단한 종자가 들어있는 열매가 지 천으로 달리는 데 황갈색의 잔털로 덮여 있다. 익으면 맛이 시고 짠맛이 도는 흰빛 육질이 생긴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싸리나무


싸리나무는 광주리, 바구니를 비롯한 생활용구에서 서당 훈장님의 회초 리, 나아가서는 명궁으로 유명한 이태조의 화살대로 애용되는 등 옛 선조 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나무였다.

또 귀중한 쓰임새는 어두운 밤을 밝혀주는 횃불의 재료이다. 요즘 TV의 역사극을 보면 기름 묻힌 솜뭉치 횃불이 등장한다. 그러나 들깨나 쉬나무 열매에서 어렵게 기름을 얻어 호롱불로나 간신히 사용하던 그 시절에 늘 솜뭉치에 쓸만한 기름은 아무리 왕실이라 하더라도 조달이 가능하지 않다. 소나무 관솔도 일부 사용하였을 것이나 싸리나무가 가장 보편적이었다.

성종이 죽자 연산 원년(1495) 장례절차를 논의하는 과정을 보면, "발인 할 때에, 도성에서 전곶까지는 사재감에서 싸리 횃불을 장만하여 노비에게 들리게 한다"하여 횃불의 재료로 궁중에서 널리 이용하였음을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훈련 나간 군인이 싸리나무를 모르면 생쌀 먹기가 일쑤였다. 싸리나무는 나무 속에 습기가 아주 적고 참나무에 막 먹을 만큼 단단하여 비 오는 날에 생나무를 꺾어서 불을 지펴도 잘 타며 화력이 강하 고 연기마저 없으니 최첨단 군수물자이기도 하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 산맥에서도 싸리나무로 불지피는 공비들의 이야기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우 리나라에 자라는 싸리나무는 20여종이나 되는데 모두 자그마하게 자라 는 난쟁이 나무이고가장 흔한 종류는 싸리와 조록싸리이다. 하나의 잎자 루에 3개씩의 잎이 달리는데 작은 잎이 예쁜 타원형이면 싸리, 잎의 끝이 차츰차츰 좁아지는 긴 삼각모양이면 조록싸리이다.

어떤 연유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전국의 수많은 사찰에는 건물의 기둥 을 비롯하여 구시(구유)와 목불(木佛)에 이르기까지 큰 나무유물이 싸리나 무로 만들어졌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승보종찰 송광사, 팔공산의 동 화사 등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구시가 중생들의 눈길을 끈다.

오 늘날 아무리 크게 자라도 사람 키 살짝인 작은 나무이지만 수 백년 수 천년 전에는 혹시 아름드리로 자란 것은 아닌가? 의심 많은 현대인들은 고 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나 식물학적인 상식으로는 전혀 가능하지도 않고 있 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구시를 비롯하여 싸리나무로 알려진 나무는 무슨 나무인가? 이 의문을 풀어보기 위하여 현미경으로 세포모양을 조사해 보았다. 예상대로 싸리나무가 아니라 실제로는 느티나무였다.

느 티나무가 왜 싸리나무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어디까지나 추정이겠으나 느티나무의 재질이 사리함 등 불구(佛具)의 재료로 매우 적합하여 절에서 도 흔히 사용한 것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사리함을 만드는데 쓰였 든 느티나무를 처음에 사리(舍利)나무로 부르다가 발음이 비슷한 싸리나무 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박상진경북대 임산공학과 교수




탱자나무


박 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서 최 참판 댁의 설명을 보면, '사랑 뒤뜰을 둘러친 것은 야트막한 탱자나무 울타리다. 울타리 건너편은 대숲이었고, 대숲을 등지고 있는 기와집에 안팎일을 다 맡는 김 서방 내외가 살고 있었 는데...'라고 생울타리를 그려놓은 구절이 있다.

탱자나무는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예로부터 울타리로 널리 심었다. 충남 서산에는 사적 11호인 해미읍성이 있는데,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깊은 도 랑을 파고 성벽 둘레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일명 탱자성이란 의미로 지성 (枳城)이라고도 하였다. 강화도에 있는 천연기념물 78호와 79호의 탱자나 무 역시 외적의 침입을 저지할 목적으로 심은 것 중의 일부가 지금까지 남 아있다.

자 연상태 그대로 두면 더 크기도 하나, 대개 사람 키보다 살짝 높이로 키운다. 약간 모가 난 초록색 줄기가 길고 튼튼하며 험상궂게 생긴 가시가 쉽게 접근을 거부하는 듯 제법 위엄을 준다. 그러나 늦봄에 피는 새하얀 꽃은 향기가 그만이고, 가을이 되면 동그랗고 노란 탱자열매가 가까이 오 지도 말라고 겁주는 가시에 어울리지 않게 일품이다.

중 국의 고전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제나라 재상 안영이 초나라의 왕을 만나러 갔을 때 안영의 기를 꺾기 위해제나라 의 도둑을 잡아놓고 '당신 나라 사람들은 도둑질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 다'고 비아냥거렸다. 이에 안영은 '귤나무는 회수(淮水)의 남쪽에서 자라 면 귤이 열리지만 회수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열린다고 합니다(橘化爲枳). 저 사람도 초나라에 살았기 때문에 도둑이 됐을 것입니다'고 응수했다.

동의보감과 본초도감에 보면 탱자열매는 피부병, 열매껍질은 기침, 뿌리 껍질은 치질, 줄기껍질은 종기와 풍증을 낫게 한다하여 모두 귀중한 약재 로 쓰였다.

나 무 자체는 별로 쓰임새가 없을 것 같으나 북채를 만드는 나무로는 탱 자나무를 최고로 친다. 소리꾼은 탱자나무 북채로 박(拍)과 박 사이를 치 고 들어가면서 북통을 '따악'하고 칠 때 울려 퍼지는 느낌의 바다에서 희 열을 맛본다고 한다.

중국 원산으로 경기 이남의 따뜻한 지역에 심고 있는 잎이 떨어지는 넓 은잎 가시나무이다. 잎 모양이 독특하여 하나의 잎자루에 3개씩의 작은 잎 이 붙어 있고, 또 잎과 잎 사이의 잎자루에는 좁다란 날개가 달려있다.

쓰임새는 생울타리이며, 제주도 등지에서는 귤나무를 접붙이는 밑나무이 다. 험상궂은 가시와 초록색 줄기 및 잎자루의 날개가 탱자나무를 다른 나 무와 구별해 내는 요점이다.

경북대 임상공학과



6] 산수유


봄 을 알리는 전령은 나뭇가지에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는 새잎과 꽃망울에 서 바로 달려온다. 음력설을 지나고 버들가지에 물이 올라 파르스름하게 변하여 갈즈음, 양지 바른 정원의 산수유는 벌써 샛노란 꽃망울을 터뜨리 기 시작한다. 실제로 이른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은 개나리도 진달래도 아 닌 산수유다.

물론 산수유보다 먼저 꽃피는 매화도 있으나 채 2월에 들어가기 전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하므로 오히려 겨울 꽃에 가깝다.

잎 이 나오기 전에 손톱크기 남짓한 작은 꽃들이 20-30개씩 모여 조그만 우산모양을 만들면서 나뭇가지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집어쓴다. 우리 나라 어디에서나 자랄 수 있으며 수십그루 또는 수백그루가 한데 어울려 꽃동산을 이루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꽃이 지고 주위의 짙푸름에 숨어버린 산수유를 잠시 잊어버릴 즈음 깊어 가는 가을과 함께 갸름한 오이씨처럼 생긴 예쁜 열매가 매달리기 시작한다 . 초록색으로 출발하여 만지면 금세 터져버릴 것 같은 해맑은 선홍색으로 익는다.

산 수유는 꽃과 열매의 모양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한약재로서도 널리 쓰 인다. 동의보감에 '산수유 열매는 정력을 보강하고 성기능을 높이며 뼈를 보호해 주고 허리와 무릎을 덮어준다. 또 오줌이 잦은 것을 낫게 한다'는 내용을 비롯해 산수유가 빠져서는 안될 탕약재의 종류만도 십여가지가 넘 는다.

삼국유사의 제2권 기이(紀異)에 실려있는 신라 48대 경문왕(861-875)에 대한 설화를 보면 당나귀를 가진 임금 이야기가 있다. '경문왕은 임금자리 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나귀의 귀와 같아지니 왕후와 궁인 들은 모두이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복두 만드는 공인(工人)만은 이를 알 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다가 죽을 때에 도 림사의 대나무 숲속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대나무를 향해서 "임금님 귀 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더니, 그 뒤로는 바람이 불 때 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났다.

왕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대나무를 베어 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더니 그 뒤에는 다만 "임금님 귀는 길다"는 소리만이 났다'라는 재미있는 이야 기가 소개되어 있다.

열매가 줄줄이 땅을 향하여 매달려 있는 모양은 유별나게 귓밥이 긴 사 람을 생각나게 하기도 하며, 이때부터 벌써 이 나무를 약재로 쓰기 위해 심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산수유 꽃으로 찾아온 봄의 향취가 익어갈 즈음, 이보다는 조금 늦게 앙 상한 겨울 나뭇가지로 얽혀있는 숲 속에는 꽃 모양이 산수유와 너무나 비 슷한 생강나무가 역시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다.

간단하게 인가 근처에 심고있는 것은 산수유, 숲속에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은 생강나무로 보아도 좋다.

키가 6-7m 자라고 가지가 퍼져 전체적으로 나무는 역삼각형의 모양을 만 든다. 줄기의 껍질이 암갈색으로 비늘처럼 조금씩 벗겨져서 약간 지저분해 보인다.

산 수유는 당초 약용식물로 심어 왔었으나 요즈음은 조경용으로 오히려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잎은 마주나고 끝이 점점 뾰족해 지는 타원형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4-7쌍의 잎맥이 활처럼 휘어져 있고 뒷면 잎맥사이 에는 갈색 털이 촘촘하다.

경북대 과.sjpark@knu.ac.kr">임산공학과.sjpark@knu.ac.kr



7] 고로쇠나무


왕 건의 고려 건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도선국사(827-898)는 백운산에서 좌선을 오랫동안하고 드디어 도를 깨우쳐 일어나려는 순간 무릎이 펴지지 않았다. 엉겁결에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잡고 다시 일어나려 하였으나 이 번에는 아예 가지가 찢어져 버렸다.

엉 덩방아를 찧은 국사는 방금 찢어진 나뭇가지에서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마침 갈증을 느낀 터라 목을 축이기 시작하였다. 신기 하게도 이 물을 마시고 일어났더니 무릎이 쭉 펴지는 것이 아닌가. 국사는 이 나무의 이름을 뼈에 이롭다는 의미로 골리수(骨利樹)라고 명명했고, 사 람들은 그때부터 나무 이름을 바꾸어 부르기 시작, 나중에 변하여 고로쇠 가 되었다 한다.

3월초 경칩을 전후하여 지리산 줄기인 백운산 자락에는 전국에서 '고로 쇠 물'을 마시러 사람들이 몰려든다.

나 무의 굵기에 따라 다르나 한 나무에서 여러 말(斗)이 나온다.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고로쇠 나무의 가지나 줄기의 꼭지에 있는 겨울눈은 봄기운을 제일 먼저 감지하고 나무의 각 부분이 깊은 겨울잠에서 어서 깨 어나라고 옥신(auxin)이라는 전령을 파견한다. 뿌리까지 내려온 전령은 필 요한 물과 영양분을 흡수하여 잎과 줄기로 보낼 것을 재촉한다. 뿌리의 세 포들은 아직 채 녹지도 않은 땅 속에서 부랴부랴 물과 양분을 빨아들여 열 심히 위로 올려보내는 데, 사람들이 올라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뽑아 낸 것이 고로쇠 물이다.

얼마 전 까지만 하여도 보기 흉하게 나무 줄기에 V자 홈을 파서 수액을 받아냈으나 요즈음은 직경 2-3cm의 구멍을 내어 채취한다. 시기는3월초의 경칩전후 약 1주일 동안의 것이 가장 좋으며 위장병, 신경통, 허약체질 등 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건 강에 좋다면 잠자는 개구리까지 몽땅 먹어치우는 우리네 식성 때문에 고로쇠 나무도 세상에 태어난 후 최대의 시달림을 받고 있다. 고로쇠 물을 빼앗긴 나무는 한창 자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차츰 기력이 떨어져 한 여 름에도 짙푸르기보다 오히려 노르스름한 잎사귀를 내놓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에 산림청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로쇠 수액채취 지침'을 내 놓았다. '수액을 채취하는 구멍은 그루 당 1-2개를 뚫고 7-10일이 지난 후에는 채 취한 구멍을 스티로폼이나 코르크 등으로 막아 균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 허가 없이 고로쇠나무 수액을 채취하면 산림법에 따라 5년 이하의 징역이 나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내린다'고 협박에 가까운 알림판을 붙여보 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고로쇠는 전국에 분포하며,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큰 나무로서 깊은 산 속에서는 아름드리로도 자란다. 가지도 잎도 정확하게 마주난다. 잎은 모 양이 독특한데 물갈퀴가 달린 오리나 개구리의 발처럼 5-7개로 크게 갈라 지고, 개개의 발가락은 삼각형이다.

꽃 은 암수 한나무로 5월에 연한 황록색으로 피우고, 열매는 프로펠러 같 은 날개가 서로 마주보며 달리는 것이 특징이고 단풍나무의 한 종류이다. 목재는 단단하고 질겨서 체육관바닥 마루판으로는 최고급재이며, 운동기구, 피아노의 엑션 부분을 만드는 데도 없어서는 안되는 나무이다.

경북대 과.sjpark@knu.ac.kr">임산공학과.sjpark@knu.ac.kr



8] 측백나무


측 백(側栢)이란 잎이 옆으로 자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본초강목 에서는 밝히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고 납작한 비늘모양의 잎이 나 란히 포개져 있어서 보통 침엽수와는 다르다. 꼭 옆으로 자란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측백이란 이름이 나무의 잎 모양과 어울린다.

측백나무의 고향은 어디일까. 약간의 논란이 있다. 중국이라는 주장과 우리나라에도 본래부터 자라던 나무라는 주장이 맞선다. 대체로 심지 않았 는데도 자연적으로 자라면 그 지방을 나무의 고향으로 본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측백나무가 거의 절벽에 붙어 자라는 것을 두고 몇 몇 일본인 학 자들은 '위쪽의 묘지에 심어둔 나무의 종자가 떨어져 사람이 갈 수 없는 절벽에 숲을 이루게 되었지만 본래는 중국 원산의 나무이다'고 주장한다.

이런 애매한 논란에는 순수한 학문적인 접근보다는 때로는 약간의 감정 이 끼게 마련이다. 어느 쪽이 맞는 지는 하느님과 혹여 자기의 족보를 잘 외우고 있는 '양반 측백나무'밖에 아는 이가 없다.

중 국의 주나라 때 임금의 능에는 소나무, 왕족의 묘에는 측백나무를 둘 레나무로 심도록 하여 소나무 다음으로 대접받는 나무이기도 하였다. 조선 왕조실록에 실린 영조대왕의 묘지문(1776)에는'장릉(長陵)을 옮겨 모신 뒤 에 효종께서 측백나무의 씨를 옛 능에서 가져다 뿌려 심으셨으니, 또한 임 금의 효성이 끝이 없다'하여 묘소의 둘레나무로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심었 음을 알 수 있다.

또 측백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선비의 절개와 고고한 기상을 나타내는 대 표적인 나무다. 중종 34년(1540) 전주 부윤 이언적이 올린 나라를 다스리 는 방법에 대한 상소문에 '군자는 소나무나 측백나무 같아서 홀로 우뚝 서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지만, 간사한 사람은 등나무나 겨우살이 같아서 다 른 물체에 붙지 않고는 스스로 일어나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이는 이덕유 가 당나라 무종에게 올린 고사를 인용하여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측백나무에 비유하여 간한 것이다.

측백나무는 석회암지대에 회양목과 같이 자라는 경우가 많으며 아름드리 로 크게 자랄 수 있는 늘 푸른 침엽수이나 대부분은 관목처럼 자란다. 나 무 껍질은 길게 세로로 깊게 갈라지고 회갈색이다. 줄기에 혹 같은 이상조 직이 잘 발달하고 줄기도 울퉁불퉁한 경우가 많다. 가지가 옆으로 벌어지 는 일반 나무들과는 달리 거의 수직으로 발달하는 것이 특징이다.

자람이 늦고 나이를 먹으면 줄기가 잘 썩어버려 나무 자체로 쓰임새는 별로 없고 예로부터 향교나 양반집의 정원 및 생울타리 등으로 흔히 심었 다.

대구시 동구 도동 향산의 측백수림은 천연기념물 1호다. 모두가 서울 중 심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문화정책에도 불구, 1호가 지방에 있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곳은 조선초기의 문신 서거정(1420~1488)의 사가집(四佳集)에 실린 대 구십경 중의 하나인 제6경으로서 북벽향림(北壁香林)이란 제목의 시가가 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옛 벽에 푸른 향나무(측백나무) 창같이 늘어섰네 /사시(四時)로 바람 곁에 끊이잖는 저 향기를 /연달아 심고 가꾸어 /온 고 을에 풍기게 하세'라고 번역하였다.

설악산과 오대산 등 높은 산의 꼭대기에는 아예 누워서 자라는 눈측백이 있다. 또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며 향기가 있고 잎이 넓은 서양측백은 미국 에서 들여와 정원수로 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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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목련


한자로 목련(木蓮)이라고 하여 연꽃처럼 아름다운 꽃이 나무에 달린다는 의미다. 찬바람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른 봄, 나뭇가지에 잎이 나오는 것 도 기다리지 못하고 피어버리는 화사한 하얀 꽃이 이 나무의 특징이다.

꽃 크기가 어른 주먹만하고 꽃잎 하나 하나는 하얗다 못해 고고한 학의 날개 깃을 보는 듯하며 향기 또한 은은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 다. 우리 주변에 흔히 심는 목련은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백목련을 두고 하는 말이며 토종 목련은 제주도에만 자란다.

목련의 겨울을 나는 모습도 좀 독특하다. 가지 끝마다 손가락 마디만한 꽃눈이 회갈색의 부드러운 털로 두껍게 덮여 있다. 겨울 동안 혹독한 추위 를 이겨내기에는 안성맞춤의 구조다. 외투는 두툼하여도 봄을 느끼는 춘감 대(春感帶)는 너무나 예민하여 봄기운이 막 찾아오려 할 때쯤 참지 못하고 벌써 꽃을 피워버린다.

꽃이 필 즈음에 꽃봉오리가 모두 북쪽을 향한다 하여 북향화(北向花)라 불리기도 한다. 과연 꽃봉오리가 북쪽을 향하는가? 자세히 관찰해 보면 겨 울 꽃눈의 끝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비율이 반은 넘는 것 같다.

과학적인 명확한 근거가 없어 옳고 그름을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실향 민들이 고향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이 꽃을 보고 북쪽에 두고 온 부모 형제를 생각하는 대상으로 여기다 보니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싶다.

작고 자질구레한 꽃을 잔뜩 피우는 보통 꽃과는 달리 가지의 꼭대기에 1개씩 커다란 꽃을 피우는 고고함이나 순백의 색깔은 이 꽃의 품격을 말하 는 것 같다.

동 의보감에는목련을 신이(辛夷)라 하여 꽃 피기 전의 꽃봉오리를 따내 어 약재로 사용하였다. '얼굴의 죽은 깨를 없애고 코가 막히거나 콧물이 흐르는 것을 낫게 한다. 얼굴의 부기를 내리게 하고 치통을 멎게 하며 눈 을 밝게 한다'고 쓰여져 있다.

삼 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 7년(서기48) 7월27일 아직도 총각인 임 금을 딱하게 여긴 신하들이 장가 들 것을 권하자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 은 하늘의 명령이니 짝을 얻는 것도 하늘의 뜻이 있을 것이다'고 하면서 점잖게 거절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키를 정돈 하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가서 그들을 맞아 들였다. 배 안에는 아리 따운 공주가 타고 있었는데, 이이가 바로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 (許黃玉)으로서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다.

꽃이 아닌 나무로서, 목련의 쓰임새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잎 이 떨어지는 넓은 잎 큰 나무이고 나무 껍질은 연한 잿빛으로 거의 갈 라지지 않는다. 잎은 넓은 달걀모양이고 어린아이 손바닥만큼 크다. 언뜻 보면 감나무 잎처럼 생겼으며 두껍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다. 열매는 손 가락 길이 만하고 주걱모양으로 휘어져 있으며 가을에 벌어지면서 매달리 는 새빨간 씨가 독특하다.

목련과 모양이 거의 비슷하나 꽃이 피는 시기가 약간 늦고 꽃의 색이 보 라빛인 것이 자목련(紫木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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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생강나무


한 약에는 감초가 들어가야 되는 것처럼 우리의 전통요리에 생강이 빠지 면 제대로 감칠맛이 나지 않는다. 잎을 찢거나 어린 가지를 분지르면 생강 냄새가 나는 나무가 바로 생강나무다. 야외수업으로 산에 가면 나는 학생 들, 특히 여학생들의 코밑에 생강나무 잎을 갖다대고 무슨 냄새가 나느냐 고 짖궂게 물어본다. 한결같은 대답은 풀냄새란다. 입시 준비에 찌들은 요 즘 여학생들이 부엌에 들어갈 짬이 없으니 독특하게 나는 생강냄새를 알 리가 없다.

이 나무는 기껏 자라야 키 5-6m에 팔뚝 굵기가 고작인 아담사이즈다. 그 러나 봄에는 꽃과 새잎, 여름에는 독특한 모양새의 잎으로 이루어지는 녹 음, 가을에는 열매와 단풍이 모두 우리의 관심을 끄는 나무다.

앙 상한 겨울나무의 가지가 아직 일어날 낌새도 보이지 않는 이른 봄, 숲 속 깊숙한 곳에서는 제일 먼저 생강나무가 샛노란 꽃을 피워 겨우 잠에서 깨어날려는 다른 나무들이 아이쿠 늦었구나! 하고 정신이 번쩍 나게 만든 다. 인가 근처에는 산수유, 숲 속에는 생강나무가 다른 어느 나무보다 빨 리 꽃이 핀다. 회갈색의 나뭇가지에 잎도 나기 전에 조그마한 꽃들이 점점 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양은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봄의 전령임을 자랑하 는듯하다. 그래서 품격 높은 매화에도 뒤지지 않는다 하여 황매목(黃梅木) 이란 이름도 얻었다.

꽃이 지고 새싹이 돋아날 때 즈음 이를 조심스럽게 따 모으면 바로 작설 차의 재료가 된다. 차나무가 자라지 않는 추운 지방에서는 차의 대용으로 사랑받아왔으며, 차(茶)문화가 사치스런 서민들은 향긋한 생강냄새가 일 품인 산나물로서 즐겨왔다.

여 름의 시원한 그늘나무로서의 역할을 거치고 나면 꽃을 보고 잊어버린 생강나무는 가을 단풍 때 다시 한번 우리의 눈길을 끈다. 곱게 물든 샛노 란 생강나무 단풍은 푸른 가을하늘과 기막히게 조화를 이룬다. 붉은 잎만 이 아름다운 단풍이 아니라는 것을 생강나무 단풍을 보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잎이 떨어진 가지에는 콩알 굵기의 새까만 열매가 달린다. 처음에 초록 빛이나 노랑빛, 분홍색을 거쳐 가을은 검은 빛으로 익는다. 옛 멋쟁이 여 인들의 삼단같은 머리를 다듬던 머릿기름이 이 열매에서 나온다. 남쪽에서 만 나는 진짜 동백기름은 양반네 귀부인들의 전유물이고 서민의 아낙들은 생강나무 기름을 애용하였다. 그래서 일부 지방에서는 개동백나무 혹은 아 예 동백나무라고도 한다.

창 경궁 경춘전 옆 낙선재 경계 담장 밑에는 생강나무로서는 거목이랄 수 있는 제법 커다란 나무가 자라고 있다. 왕비나 빈의 품계에 오르지 못한 이름없는 궁녀들은 동백기름을 얻어 멋 낼 차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니 아 마 생강나무 기름으로 머리단장하고 꿈처럼 찾아줄 임금님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전국 어디서나 자라는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작은 나무다. 나무 껍질은 갈라지지 않고 흰 반점이 있다. 잎은 어긋나기로 나며 계란모양으 로 위 부분이 3-5개로 갈라지고 아기 손바닥만하다. 가장자리는 밋밋하며 뒷면에 털이 있다. 암수가 딴 나무다.




10] 능수버들


가 지가 아래로 운치 있게 늘어지는 큰 버드나무에는 능수버들과 수양버 들이 있다. 봄에 새가지가 나올 때 적갈색인 것은 수양버들, 황록색인 것 은 능수버들이다. 두 나무는 너무 비슷하여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구분이 어렵다. 어느 쪽인지 정확한 판별은 전문가의 몫이고 우리는 늘어지는 버 들을 수양버들보다는 더 낭만적인 능수버들로 알고 있어도 크게 틀림이 없 을 것 같다.

능수버들은 경기민요 가락에 나오는 흥타령 천안삼거리를 연상하게 만든 다.

'천안삼거리 흥/능수야 버들은 흥/제멋에 겨워서 흥/축 늘어졌구나 흥...' 이 짧은 구절에서 우리는 능수버들의 모양새를 짐작하고도 남으며 어깨를 들먹일 춤판이 금세 벌어질 것 같은 감흥에 사로잡힌다.

천 안시 삼룡동에 있는 '천안삼거리'는 능수버들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 설이 있다. 옛날 한 홀아비가 능소(綾紹)라는 어린 딸과 가난하게 살다가 변방의 군사로 뽑혀 가게 되었다. 그는 천안삼거리에 이르자 어린 딸을 더 이상 데리고 갈 수가 없어서 주막에 딸을 맡겨 놓기로 했다. 그리곤 그는 버드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고 딸에게 이르기를 '이 나무가 잎이 피면 다시 이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 후 어린 딸은 곱게 자라 기생이 되었으며 미모가 뛰어난데다가 행실 이 얌전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마침 과거를 보러 가던 전라도 선비 박현수와 인연을 맺었고 서울로 간 그는 장원급제하여 삼남어사가 되었다. 박 어사는 임지로 내려가다가 이곳에서 능소와 다시 상봉하자 '천안삼거 리 흥, 능소야 버들은 흥'이라노래하고 춤추며 기뻐하였다.

마침 전쟁에 나갔던 아버지도 살아서 돌아와 능소와 다시 만날 수 있었 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곳의 버드나무를 능소버들 또는 능수버들이라 부르 게 되었다 한다.

능 수버들은 벌써 삼국시대부터 임금님도 좋아하던 나무였다. 삼국사기 백제 무왕 35년(634)조에는 '3월, 대궐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사면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방장선산을 흉내낸 섬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오늘날 부여읍 남쪽에 있는 궁남지(宮南池) 를 일컫는다.

조선후기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에 보면 지금의 창경궁 영춘문 앞 도로 건너편과 종묘 쪽 궁내에 여러 그루의 능수버들이 보인다. 경복궁 경회루 옆에는 지금도 능수버들이 자라고 있으며 조선의 궁궐 여 기저기에 많은 능수버들이 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의 활쏘기 명인이라면 윌리엄 텔이고 우리나라의 명궁이라면 태조 이성계를 꼽는다. 그 탓에 조선왕조 때는 임금이 참가한 활쏘기가 흔히 있 었으며, 최고의 명궁은 늘어진 능수버들의 잎을 맞히는 것이다. 말이 그렇 지 엄지손가락 너비만한 능수버들 잎을 활로 맞힌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 고, 많은 버들잎 중에 어느 잎이 맞았는지 찾아내는 방법도 없다. 아마 그 만큼 정확해야 한다는 상징의 의미였을 것이다.

비슷한 나무에는 수양버들 외에 용버들이 있다. 용모양의 버들이란 의미 인데 늘어지기는 마찬가지이나 어린가지는 물론 상당히 굵은가지까지도 용 이 승천하는 그림처럼 꾸불꾸불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11] 개나리


봄 의 아름다움은 노랑 빛에서 시작된다. 정원의 산수유, 산 속의 생강나 무, 길가의 개나리에서 노랑나비, 노랑병아리 등에 이르기까지 노랑 빛의 느낌은 새 생명이 주는 무한한 가능성, 희망 바로 그것이다. 새 생명이 움 트는 봄의 대명사 노란 꽃의 왕좌는 개나리다.

벚꽃으로 떠들썩하게 봄소식을 전하는 오늘날과는 달리 옛 봄의 전령은 개나리가 첫 꽃망울을 터뜨리는 제주도에서 시작하여 남해안을 상륙하고 산따라 길따라 서울을 거쳐 평양, 신의주까지 온 나라를 노랗게 물들여 놓 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개나리꽃은 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앙증맞게 생긴 노란 꽃에 불과하지만 수백 수천 개의 꽃이 무리 지어 필 때 아름다움을 더한다. 정원에 개나리 가 없다면 가지를 꺾어다 양지바른 곳에 그냥 꽂아만 두어도 잘 자라니 봄 이 다 가기 전에 한 포기쯤 꼭 심어보자. 더욱이 개나리의 학명(學名)에 코레아라는 이름이 들어간 자랑스런 우리의 토종 꽃나무이다.

말나리, 하늘나리, 솔나리, 참나리 등 아름다운 우리나라 꽃에 '나리'란 이름이 들어간 종류가 많다. 이들은 개나리와 꽃 모양새가 아주 닮아 있다.

꽃 이 져 버린 개나리는 쓰임새가 없는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가을에 달리는 볼품 없는 열매가 귀중한 한약재임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개나리의 열매는 연교(連翹)라고 하는데 종기의 고름을 빼고 통증을 멎게 하거나 살충 및 이뇨작용을 하는 내복약으로 쓴다고 알려져 있다.

기록으로 보면 세종5년(1423) 일본사신이 연교 2근을 올린 적이 있고, 선조 33년(1599)에는 임금이 앓자 홍진이란 의사는 청심환에다가 연교를 넣어 다섯 번 복용하시도록 처방하였으며 정조 18년(1793)에는 내의원에서 연교를 넣은 음료를 올렸다는 내용이 있다.

오늘날 잘 쳐다보지도 않는 개나리 열매는 한때 임금님의 건강을 지키는 약재로 쓰였으니 제법 대접을 받은 시절도 있었나 보다.

전 국 어디에나 자라고 잎이 떨어지는 작은 나무이다. 크게 자라도 사람 키를 조금 넘을 정도가 고작이고 땅에서 많은 줄기가 올라와 한 포기를 이 룬다. 울타리로 심으면 아래로 늘어지는 가지가 꽃이 진 다음에도 멋스런 운치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어린 가지는 초록빛이나 차츰 회갈색으로 된 다. 자세히 보면 작은 점 같은 숨구멍이 뚜렷하게 보인다. 잎은 마주나기 하며 긴 타원형으로 윗부분에 톱니가 있거나 때로는 밋밋하다.

꽃은 이른 봄 잎이 나오기 전에 잎겨드랑이에 1-3개씩 핀다. 열매는 달 걀모양이며 편평하고 가을에 갈색으로 익으며 날개가 있다.

개 나리와 비슷한 나무로, 세계적으로 한 종류 밖에 없으며 우리나라의 충북, 전북의 일부 지역에만 자라는 미선나무가 있다. 열매가 마치 부채를 펴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모양이므로 미선(美扇)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른 봄 개나리처럼 잎보다 먼저 피고 흰빛 또는 분홍색으로 피며 은은한 향 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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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진달래


산 넘어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따스한 봄바람을 완연히 느낄 즈음 동네의 앞산은 물론 높은 산의 꼭대기에도 온통 진달래꽃으로 뒤덮인다. 붉은 빛 깔이 조금 더 강한 분홍색의 꽃은 잎보다 먼저 가지마다 무리지어 피우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예로부터 사랑을 노래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손님이 다.

"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로 이어지는 소 월의 시속에서의 정경처럼 진달래꽃은 너무나 정겨운 우리 강산의 우리 꽃 이다. 북한의 영변 약산은 소월이 아름다운 시상을 얻던 낭만적인 곳이 아 니라 무시무시한 핵 시설로 우리에게 더 다가오는 것이 안타깝다.

진 달래는 한때 북한의 국화로 알려져 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은 꽃빛과 함 께 금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김일성이 좋아했으며 과거 항일 빨치산 활동을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목련과 사촌쯤 되고 자 기들 이름으로는 목란(木蘭), 우리 이름으로는 함박꽃나무가 북한의 국화 임이 최근에 와서야 알려졌다.

남부지방에서는 진달래란 이름보다 참꽃이 더 친숙하다. 가난하던 시절 에는 진달래가 필 즈음이 가장 배고픈 시기다. 주린 아이들은 진달래 꽃잎 을 따먹고 허기를 달래서 진짜 꽃이란 의미로 참꽃이란 이름을 자연스럽게 붙였다.

식 물도감을 찾으면 제주도에 참꽃나무가 있다고 적혀있기도 하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참꽃'은 진달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린시절 진달래 꽃잎 은 따먹어도 비슷한 철쭉은 연달래라 하여 먹으면 죽는다고 '선배 어린이' 들로부터 단단히 교육을 받았다. 철쭉꽃에독이 있다는 것을 용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자 이름은 두견화(杜鵑花)다. 중국의 촉나라 망제(望帝)는 죽음의 직 전에 이른 벌령이란 사람을 살려서 정승으로 중용하였다가 아예 나라를 빼 앗기고 국외로 추방되는 비운을 당한다.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죽 어서 두견새가 되어 밤마다 촉나라를 날아 다니며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 그 피가 진달래 가지위에 떨어져 핀 꽃이 바로 두견화, 우리의 진 달래꽃이란 것이다.

음 력 3월3일의 삼짇날에는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라 하여 봄을 맞는 마음 으로 꽃전(花煎)을 붙여먹는 풍습이 있다. 화전이란 찹쌀가루에 꽃잎을 얹 어서 지진 부침개를 말하는데, 이 풍속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며 조선시대 는 비원에서 삼짇날 중전이 궁녀들과 함께 진달래꽃 화전을 부쳐먹는 행사 를 치르기도 하였다.

청주에 선 진달래꽃을 넣어 술을 빚고 두견주라고 한다.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이 병에 걸려 휴양할 때 17세 된 딸이 꿈에 신선의 가르침을 받아 만든 술이라고 하며 진통, 해열, 류머티즘의 치료약으로 쓰였다. 진달래 꽃잎에 녹말가루를 씌워 오미자 즙에 띄운 진달래 화채 역시 삼월삼짇날의 절식(節食)이다.

전국 어디에서나 사람 키보다 조금 클 정도로 자란다. 손목 굵기 정도면 꽤 오래된 나무에 속하고 껍질은 매끄러운 회백색이다.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형이며, 양끝이 좁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벌어진 깔때기형이고 가장자리가 5개로 갈라진다. 드물게 백색 꽃이 피는 것을 흰진달래라 하여 아주 귀하게 여긴다.



13] 느릅나무


원 효대사가 요석공주를 얻기 위하여 일부러 남천으로 뛰어 들어 빠졌던 그 다리의 이름이 유교(楡橋)이다. 곧 느릅나무 다리란 뜻이다. 몇년전 경 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바로 그 다리로 짐작되는 나무다리를 남천가에서 발굴 했다. 재질을 알아보았더니 실망스럽게도 참나무였다고 한다. 아마 다리 옆에 느릅나무가 있어서 유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느 릅나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목재로서의 쓰임새도 많지만 나무껍질은 한약재로 유명하다. 뿌리의 껍질은 유근피(楡根皮)라 하여 동의보감에는 '대소변을 잘 통하게 하고, 위장의 열을 없애며, 부은 것을 가라앉히고, 불면증을 낫게 한다'고 한다. 나무껍질은 유백피(楡白皮)라 하여 역시 약 재로 쓰일 뿐만 아니라 소나무의 속껍질처럼 예부터 흉년때 허기를 달래는 데도 요긴하게 쓰였다.

삼 국사기 온달 장군 이야기에는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내용 이 있다. 평강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 자 온달의 집까지 찾아가서 시집을 가겠다고 청하였다. 눈먼 온달의 노모 가 이르기를,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어서 귀인이 가까이 할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지 오래입니 다" 라고 거절했다.

마 침 산에서 내려오는 온달과 마주쳤다. 그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 니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필시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며 돌아보지 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끈질기게도 온달의 초가집 사립문 밖에서 노숙 하면서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 드디어 허락을 받았다.

혹시 온달을 부러워하는 이가 있다면 꿈을 깨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공 주라는 신분에다 글 모르는 신랑을 교육시켜 장군으로 출세까지 시켰으니 온달 입장에서야 평생 평강 공주에게 큰 소리 한번 낼 수 있었겠는가.

전 국 어디에나 자라고 잎의 밑 부분이 좌우 대칭이 안되고 어긋나 있는 것이 느릅나무 종류의 특징이다. 여러 느릅나무가 있으나 주변에서 흔히 보는 종류는 느릅나무와 참느릅나무다. 나무 껍질이 오래되면 흑갈색으로 세로로 깊이 갈라지며 잎이 크고 겹 톱니가 있는 것이 느릅나무, 나무 껍 질이 오래되면 회갈색으로 두꺼운 비늘처럼 떨어져 나오며 잎이 메추리 알 크기 만하고 단순 톱니가 있는 것이 참느릅나무다.

열매는 크기가 손톱 만하고 종이처럼 얇은 데 한 가운데 납작한 종자가 들어 있어서 바람에 날아가기 쉽게 되어 있다. 모양이 동전과 비슷하여 옛 날에는 동전을 유전(楡錢) 혹은 유협전(楡莢錢)이라고도 하였다.

박목월의 '청노루' 시에도 나오는 우리에게 낯익은 나무다.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 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굽이를 /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

느릅나무에 봄이 찾아오는 모습이 눈앞에 잡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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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벚나무


벚 나무는 커다란 나무에 잎도 나오기 전, 화사한 꽃이 구름처럼 나무를 완전히 덮어 버리는 아름다운 나무이다. 꽃봉오리가 열리기 시작하여 일주 일 정도면 한꺼번에 피었다가 져버리는 꽃이다. 동백이나 무궁화처럼 통째 로 꽃이 떨어져 나무 밑에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라 벚꽃은 5개의 작은 꽃 잎이 한 장씩 떨어져 산들바람에도 멀리 날아간다. 그래서 벚꽃이 떨어지 는 모양은 산화(散花)란 말이 어울리고 비슷한 어감의 산화(散華)는 꽃다 운 나이에 전쟁에서 죽은 젊은이와 비유한다.

벚나무는 천년을 거뜬히 넘기는 은행나무나 느티나무와는 달리 백수(白 壽)를 채 넘기지 못하는 인간의 수명과 비슷하다. 꽃이 한꺼번에 피느라 정력을 너무 소모해 버렸고 유달리 갑각류 곤충의 피해를 받기 쉬운 탓이 란다.

우 리에게 다가오는 벚꽃의 느낌은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불행히 도 이 아름다운 꽃이 일본을 대표하는 꽃으로서 일제 강점기에는 그들이 사는 곳은 벚나무로 치장하였으며, 더욱이 우리의 전통 궁궐인 창경궁에 동물원을 조성하고, 그도 모자라 벚나무를 줄줄이 심고 시민의 휴식처란 이름으로 꽃구경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벚나무로 상징되는 치욕 의 역사를 우리는 쉽게 지울 수 없다.

벚꽃이 피는 나무는 벚나무, 왕벚나무, 산벚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섬벚나무, 꽃벚나무, 능수벚나무 등 그 종류가 많다. 이들의 차이점은 암 술대와 꽃자루에 털이 있느냐, 꽃잎 길이의 길고 짧음 등이 고작이어서 오 랫동안 식물분류학을 공부한 전문가만이 구별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가 벚나무 심기의 최대 명분으로 삼는 제주도 자생의 왕벚나 무나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에 심는 벚나무나 보는 사람은 그냥 '벚나무'일 따름이다.

옛 문헌에 보면 벚나무와 자작나무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다 같이 화 (樺)자를 쓸 만큼 꽃에는 관심이 없었다. 꽃보다는 껍질의 이용이 더 중요 하였다.

벚 나무 껍질은 화피(樺皮)라는 이름으로 활을 만드는데 필수품으로 들어 가는 군수물자이었다. 세종실록의 오례에 관한 내용 중에 '붉은 칠을 한 활은 동궁이라 하고, 검은 칠을 한 것은 노궁이라 하는데 화피를 바른다' 하였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화피 89장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병자호란을 겪고 중국에 볼모로 잡혀간 효종은 그 때를 설욕하려고 대대적 인 북벌 계획을 세우고 활을 만들 준비로 서울 우이동에 많은 벚나무를 심 게 하였다.

벚 나무는 꽃과 껍질의 쓰임새로 끝나지 않는다.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옛 목판(木板)인쇄의 재료로서 배나무와 함께 가장 사랑 받는 나무였다. 팔만대장경판에 쓰인 나무의 60% 이상이 산벚나무로 만들어 졌음이 최근 현미경을 이용한 과학적인 조사에서 처음으로 밝혀졌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껍질이 세로로 갈라지는 것과는 달리 벚나무 종류들 은 가로로 짧은 선처럼 갈라지기 때문에 멀리서도 쉽게 찾아 낼 수 있다.

그래서 몽골군에 유린당한 육지에서 몰래 한 나무씩 베어 가까운 강을 타고 경판(經板) 만드는 곳으로 운반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15] 살구나무


옛날 중국 오나라의 동봉(董奉)이란 의사는 환자를 치료해 주고 치료비 를 받는 대신 의원앞 뜰에다 중환자는 다섯 그루, 병이 가벼운 환자는 한 그루의 살구나무를 심게 하였다.

얼 마되지 않아 동봉은 수십만 그루의 살구나무 숲을 갖게 되었고 사람들 은 이 숲을 동선행림(董仙杏林) 혹은 그냥 행림이라고 불렀다한다. 그는 여기서 나오는 살구열매를 곡식과 교환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도 하 였다. 그래서 행림이라면 진정한 의술을 펴는 의원을 나타낸다.

왜 많은 과일나무 중에 하필이면 살구나무인가? 한방에서는 살구씨를 행 인(杏仁)이라 하여 만병통치약처럼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서 살구 다섯 알을 따내 씨를 발라 동쪽에서 흐르는 물을 길어 담가 두었다가, 이른 새벽에 이를 잘 씹어 먹으면 오장의 잡물을 씻어내고 육부 의 풍을 모두 몰아내며 눈을 밝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본초강목 에도 200여 가지의 살구씨를 이용한 치료방법이 알려져 있어서 약방의 감초가 아니라 '약방의 살구'역할을 한 것이다. 그래서 살구열매가 많이 달리는 해에는 병충해가 없어 풍년이 든다고도 하며 살구나무가 많은 마을에는 염병이 못 들어온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흔히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병원 앞에 살구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말한 다. '우선 살구 보자'라는 뜻이라니 옛 사람들의 행림이나 오늘날의 살구 는 무병장수의 진정한 바람을 다같이 살구나무와 병원과의 관계에서 찾았 는지도 모른다.

살구나무는 중국에서도 재배역사가 오래된 과일나무이며 우리나라에 들 어온 것도 삼국시대 훨씬이전일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복숭아, 자두와 함께 우리의 대표적인 옛 과일로서 역사기록에 흔히 등장한다.

살구꽃이 피는 시기를 보아 이상 기후인지 정상인지를 판단하였고 조선 태종 때의 기록을 보면 철따라 종묘의 제사에 올리는 제물로서 앵두와 함 께 살구는 빠뜨릴 수 없는 과일이었다.

꽃과 과일로서만의 살구나무가 아니다. 깊은 산 속 고즈넉한 산사에서 학덕 높은 스님이 두들기는 목탁의 맑고 은은한 소리는 어디서 얻어질까? 몇가지 나무가 알려져 있지만 최고로 치는 목탁은 살구나무 고목에서 얻는 다고 한다.

일 제의 강제병탄 이후 처음 들어선 1920년대의 고무공장에는 처녀들이 발목이 약간 들어 날 정도의 짧은(?) 치마를 입고 다녔다 한다. 이를 두고 당시에 '공장 큰아기 발목은 살구나무로 깎았나 보다/ 보기만 하여도 신침 이 도네!.../ 보기만 하여도 알딸딸하네!'라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살구나무의 속살은 맑고 깨끗한 흰색이 특징으로 살짝 내보인 발목이 그렇 게 섹스어필하였던 모양이다. 그 때 그 어른들이 환생하여 오늘의 거리를 보신다면 아마 기절하여 다시 돌아가실 것이다.

시 골 집안이나 마을 주변에 흔히 심는다.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나무로 그렇게 크게 자라지는 않는다. 잎은 달걀모양이며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톱 니가 있다. 꽃은 봄이 무르익어 갈 무렵 잎보다 먼저 연분홍색으로 피며 꽃자루가 거의 없다. 열매는 지름 3cm 정도로 둥글며 털이 있고 초여름에 붉은 빛이 도는 노랑 색으로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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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복숭아나무


중 국 진(陳)나라 효무제(376-396) 때, 무릉(武陵)에 살던 어부가 계곡을 따라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 숲 속의 어느 동굴을 지나 복사꽃이 만발하 게 피어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한 마을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논밭이 넓 고 먹거리가 풍족하며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남녀노소가 모두 행복하게 살 고 있었다. 어부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며칠 지낸 뒤에 집으로 돌아온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실려있는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세종29년(1447년)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본 복숭아 숲의 경치를 화가 안견에게 이야기하여 3일만에 그림을 완성한 몽유도원도(夢遊 桃源圖) 역시 이상향의 모델을 복숭아 숲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하 늘나라에는 신선이 먹는 천도(天桃)가 있었다. 전설적인 신선 서왕모 (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먹은 동방삭은 삼천갑자년, 즉 18만년을 살았다 한다. 또 서유기에는 손오공이 먹기만 하면 불로장생할 수 있는 천도 밭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있다가 어느 날 9천년에 한 번 열리는 열매를 몽땅 따 먹어 버렸다. 그는 이 사건으로 나중에 삼장법사가 구해 줄 때까지 500년 동안 바위 틈에 갇히는 호된 시련을 겪게 된다.

이처럼 수많은 과일 중에 복숭아는 신선이 즐겨먹는 과일로 묘사되고 복 숭아 숲은 신선사상과 이어져 유토피아의 대명사가 되었다. 신라시대에 만 들어진 술잔, 고려 때의 청자연적 및 주전자, 조선시대의 백자연적 등에는 복숭아나무의 꽃, 잎, 열매가 그려져 있는 것이 많다.

고 려 인종 원년(1123년) 송나라의 서긍이 사신으로왔다가 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의 귀족들은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하였으며 피 부를 희게 하려고 복숭아꽃 물이나 난초 삶은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민속 으로는 특히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가 잡스러운 귀신들을 쫓아내 는 구실을 한다고 믿고 있었다. 무당이 살풀이할 때는 복숭아 나뭇가지로 활을 만들어 화살에 메밀떡을 꽂아 밖으로 쏘면서 주문을 외기도 한다.

세종 2년(1420년) 어머니인 원경왕후가 위독해지자 '임금이 직접 복숭아 가지를 잡고 지성으로 종일토록 기도하였으나 별 효험이 없었다'하며, 연 산 12년(1505년)에는 '해마다 봄.가을의 역질 귀신을 쫓을 때에는 복숭아 나무로 만든 칼과 판자를 쓰게 하라'하여 왕실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복 숭아나무는 귀신을 물리치는 나무였다. 그래서 제사를 모셔야 하는 사당이 나 집 안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으며 제상의 과일에도 절대로 복숭아를 쓰지 않는다.

동 의보감에 보면 복사나무는 그야말로 버릴 것 하나없는 약재이다. 복사 나무 잎, 꽃, 열매, 복숭아씨(桃仁), 말린 복숭아, 나무속껍질, 나무진을 비롯하여 심지어 복숭아 털, 복숭아 벌레까지 모두 약으로 쓰였다. 으스름 달밤에 복숭아를 먹는 것은 약이 되는 복숭아 벌레를 가장 쉽게 먹는 방법 이다. 아무리 약이라지만 혹시 반 토막난 벌레를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가졌다면 먹기가 정말 끔찍하였을지 모른다.

꽃을 보기 위하여 개량한 복숭아나무에는 꽃잎이 여러 겹으로 된 만첩홍 도가 가장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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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자작나무


' 닥터 지바고'나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옛 영화를 보면 광활하게 펼쳐진 설원(雪原)에 간간이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의연히 맞서서 쭉쭉 뻗은 늘씬한 몸매와 하얀 피부를 한껏 자랑하는 나무 미인들의 군상이 바로 자작나무이다. 그녀는 남남북녀라는 말에 걸맞게 얼 음이 꽁꽁 어는 추운 지방에만 자란다. 자작나무 껍질은 하늘을 날던 천사 가 차디찬 겨울 산 속에 처절하게 서 있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흰 날개로 나무의 등걸을 칭칭 둘러 싼 것 같다.

흰 껍질은 얇은 종이를 여러 겹 붙여 놓은 것처럼 차곡차곡 붙어 있으며 한장 한장이 매끄럽고 잘 벗겨지므로 종이를 대신하여 불경을 새기거나 그 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또 여기에는 큐틴(Cutin)이란 일종의 방부제가 다 른 나무보다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물이 스며들지 않고 부패나 좀이 먹고 곰팡이가 스는 것을 방지한다. 그래서 아무리 나쁜 조건, 심지어 몇천년을 땅속에 묻혀 있어도 거뜬히 버틴다.

러시아는 자작나무 껍질에서 기름을 짜 가죽가공에 쓰는데, 이 가죽으로 책표지를 만들면 곰팡이와 좀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1973 년에 발굴된 천마총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다 하늘을 나는 천마(天 馬)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인 21년 금관총에서 출 토된 금관은 관 안쪽에 자작나무 껍질과 섬유를 대어 머리에 쓰도록 만들 어져 있었다.

또 자작나무 껍질에는 초를 만드는 왁스 성분도 있어 잘 썩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을 붙이면 잘 붙고오래가므로 촛불이나 호롱불 대신에 불을 밝 히는 재료로도 애용되었다.

결혼을 화혼(華婚)이나 화촉(華燭)을 밝힌다고 하는 것도 자작나무 껍질 의 불타는 성질과 관련이 있다. 자작나무란 이름도 껍질이 탈 때 '자작자 작' 소리가 난다는 데서 따온 의성어이다.

나무는 껍질만큼이나 나무속도 거의 황백색으로 깨끗하고 균일하며 옹이 하나 없어 추운 지방의 서민들은 이 나무를 쪼개어 너와집의 지붕을 이었 으며 죽으면 껍질로 싸서 매장하였다.

자 작나무의 또 하나 큰 쓰임새는 수액(樹液)을 뽑아서 마시는 것이다. 곡우때 쯤 줄기에 구멍을 뚫고 엄지손가락 굵기 만한 파이프를 꽂아 물을 받아 마시면 위장병을 비롯한 잔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다 고 알려져 있다.

생 명수를 인간에게 뺏기고도 의연히 서 있는 자작나무를 보고 있으면 흰 껍질 때문에 다가오는 처량함과 아울러 생명의 경외마저 느끼기도 한다. 자작나무가 없는 남부 산간지방에서는 거제수나무, 일명 거자수에서 수액 을 채취하여 '곡우물'이란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시고 있다.

자작나무와 거제수나무는 나무 껍질이 매우 비슷하여 혼동하기 쉽다. 우 선 남한에서는 자연적으로 자라는 자작나무는 없고 대부분 거제수나무이다. 잎 모양으로 보아서 자작나무는 거의 삼각형이며 잎맥이 6-8쌍인데 비하 여 거제수나무는 타원형이고 잎맥의 수가 10-16쌍이므로 주의 깊게 관찰하 면 구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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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돌배나무


"배꽃에 달빛 내려 비추고 은하수 흘러가는 깊은 밤/한가닥 나뭇가지에 걸린 춘심(春心)을 두견새가 어이 알랴마는/다정도 병이련가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 말의 문신 이조년의 다정가(多情歌)이다.

흐드러지게 피는 새하얀 배꽃 위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걸려있는 모습 을 보면 누구라도 시 한 수 읊조리고 싶어진다. 여기에 배꽃 필 무렵 쌀로 빚는다는 이화주(梨花酒) 한잔을 곁들인다면 그야말로 '주상첨화(酒上添 花)'이다.

배나무는 꽃으로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복숭 아, 자두와 함께 대표적인 옛 과일로서 제사상의 맨 앞 과일 줄 조율시이 (棗栗枾梨)에 들어갈 만큼 먼 옛날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만 해 한용운이 1920년대에 쓴 '해인사 순례기'를 보면 환경(幻鏡)이란 스님은 가을에 돌배를 따두었다가 즙을 내어서 그릇에 넣고 밀폐하여 공기 를 통하지 못하게 하여 두었다가 차로 만들어 먹었다 한다. 이 차는 돌배 에서 이름을 딴 석차(石茶)라고 하며 수년을 두어도 그 맛이 조금도 변치 않는다니 한번쯤 만들어 먹어 볼만하다.

배 나무의 목재는 은은한 황갈색에 재질이 골라 옛부터 여러 용도로 쓰였 다. 대표적인 것이 벚나무와 함께 목판(木板)의 재료이다. 해인사 팔만대 장경판은 산벚나무 다음으로 돌배나무가 많이 쓰였으며 조선시대의 양반가 에 보관되어 오고 있는 문집의 목판도 배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배나 무 세포는 배열이 고르고 물관의 크기가 적당하며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 아 글자를새기기에 알맞은 것.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 양원왕 2년(546) '봄 2월, 서울에 가지가 서로 맞붙은 배나무 연리(連理)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연리란 나무와 나무 를 맞붙여 묶어두면 껍질이 파괴되고 서로의 부름켜가 연결되어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이다. 연리목이 알려지면 나라에서는 상서로운 조짐으로 받아들 였고 백성들은 이 나무에다 빌면 금실이 좋아지는 것으로 알았다.

태조 이성계는 배나무와 인연이 많다. 왕업을 일으킬 꿈을 꾸고 토굴 속 에 있는 신승(神僧) 무학에게 그 뜻을 풀어보게 하였고, 즉위한 뒤에는 토 굴이 있던 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석왕사라 하였으며 배나무를 손수 심 었다.

전 북 마이산의 은수사에 있는 천연기념물 386호 청실배나무는 태조가 명 산인 마이산을 찾아와 기도를 마친 뒤 그 증표로 씨앗을 심은 것이 싹이 터 자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 태조실록 총서에는 '백 보(步) 밖에 서로 포개어 달려있는 수 십 개의 배를 한 번에 쏘아서 손님을 접대하였다' 하여 활 솜씨 자랑에도 능수버들과 함께 배나무를 이용하였다.

그 냥 우리가 배나무라는 것은 돌배나무, 산돌배나무, 참배, 백운배나무, 문배나무, 청실배나무 등 엇비슷한 배나무 종류를 통털어서 부르는 이름 이다. 우리나라에는 금화배, 함흥배, 봉산배 등이 옛부터 토종 배로서 널 리 알려졌으나, 일제 침략과 함께 들어온 개량품종들에 밀려 현재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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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느티나무


시골 동네 어귀에는 어김없이 정자나무 한 그루가 초가 지붕과 어우러져 서정적인 우리 농촌 마을의 마스코트 역할을 한다. 이같은 정자나무는 대 부분 느티나무이다.

느 티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천년을 손쉽게 훌쩍 넘기는 장수목이다. 짧 게는 조선왕조, 길게는 고려나 신라인과 삶을 같이 해오면서 민족의 비극 도, 애달픈 백성들의 사연도 모두 듣고 보아오면서 오늘도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는 나무가 바로 느티나무이다.

그 래서 전설을 간직한 느티나무는 수없이 많다. 전북도 임실군 오수면에 는 술에 취하여 잔디밭에 잠자는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견(義犬)을 기리 는 '개나무'란 이름의 큰 느티나무가 자란다.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의 현고수(懸鼓樹)나무는 임진왜란때 의병대장 곽재우 장군이 이 나무에 북을 매달아 놓고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유서 깊은 나무이다.

느 티나무의 목재는 나무 결이 곱고 황갈색의 색깔에 약간 윤이 나며 썩 거나 벌레가 먹는 일이 적은데다 다듬기도 좋다. 그러면서도 물관의 배열 이 독특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갖고 있으며 큰 나무가 될수록 비늘모양, 구 슬모양, 모란꽃 모양의 무늬와 함께 기름 끼가 약간 배어있는 듯한 광택도 있다. 건조를 할 때 갈라지거나 비틀림이 적고 마찰이나 충격에 강하며 단 단하기까지 하다.

느 티나무가 갖는 바깥모양의 고고함을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나무의 여러 가지 속 성질만을 종합해 보아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나무라고 단정할 수 있다. 한마디로 나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장점을 다 가지고 있 는 '나무의 황제'이다.

나 무 다루는 기술이 남달랐던 우리의 선조들이 느티나무를 그대로 썩혀 둘 리가 없다. 경산 임당의 원삼국시대 고분과 부산 복현동 가야고분 및 천마총 관재, 완도 어두리에서 인양된 고려초 화물운반선의 배 밑바닥 판 자 등을 모두 느티나무로 만들었다.

건 축재로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전, 조선시대 사찰건물인 강진 무위사, 부여의 무량사, 구례 화엄사의 기둥은 전부 혹은 일부가 느티나무이다. 또 흔히 스님들이 '싸리나무'로 만들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구시(행사때 쓰는 큰 나무 밥통), 기둥, 나무 불상도 사실은 대부분 느티나무이다.

기타 사방탁자, 뒤주, 장롱, 궤짝 등의 조선시대 가구까지 느티나무의 사용범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정 자나무로서 느티나무만 상상하여 키가 그리 크지 않고 둥그스럼하게 퍼지는 나무로만 알면 큰 잘못이다. 숲 속에서 다른 나무와 경쟁하여 자라 는 느티나무는 곧바르고 우람하게 자란다. 그것도 적당히 자라다 그만 두 는 것이 아니라 키가 20-30m, 지름 너덧 아름은 보통이므로 임금님의 관재 로도, 사찰의 기둥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이다.

산 림청은 새 천년을 맞아 밀레니엄나무로 느티나무를 선정하였다. 느티 나무는 역사성과 문화성을 지니고 있으며, 새 천년동안 강한 생명력을 유 지할 수 있는 장수(長壽) 나무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름만의 새 천년 나무 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는 느티나무가 되었으면 한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19] 조팝나무


조 선후기의 고전소설 토끼전에서는 별주부가 육지에 올라와서 경치를 처 음 둘러보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에, '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고 하직하고, 강남서 나오는 제비는 왔노라고 현신(現身)하고, 조팝나무에 비쭉새 울 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오...'하는 내용이 나온다.

4월말이나 5월초의 산기슭에는 지금도 조팝나무 꽃이 어디서나 흔하게 피어있으니 별주부가 토끼를 꾀어내던 그 시절에는 더더욱 흔한 꽃나무이 었을 것이다. 자라의 작은 눈에도 육지에 올라오자 금세 눈에 뜨인 나무가 바로 조팝나무였던 모양이다.

왜 조팝나무인가? 한창 꽃이 피어 있을 때는 좁쌀로 지은 조밥을 흩뜨러 놓은 것 같다 하여 '조밥나무'로 불리다가 조팝나무로 된 것이다.

늦 은 봄 잎이 피기 조금 전이나 잎과 거의 같이 굵은 콩알만한 크기의 새하얀 꽃들이 마치 흰 눈 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수백 수천 개가 무리 지어 핀다. 하나 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작은 꽃이 아니련만 무리를 이루므 로 좁쌀 밥알에 비유될 만큼 꽃이 작아 보인다. 흰빛이 너무 눈부셔 언뜻 보면 때늦게 남아있는 잔설(殘雪)을 보는 듯도 하다.

그 러나 조팝나무의 쓰임새는 꽃을 감상하는 것보다 약용식물로 이름을 날린다. 조팝나무에는 조팝나무산(酸)이라는 해열과 진통제 성분이 포함되 어 있으며, 버드나무의 아세틸살리실산(acetyl salicylic acid)과 함께 진 통제의 원료가 되기도 한다. 진통제의 대명사 아스피린(aspirin)이란 이름 은 아세틸살리실산의 'a'와 조팝나무의속명(屬名) spiraea에서 'spir'를 땄고 나머지는 당시 바이엘사가 자기회사 제품명 끝에 공통적으로 썼 던 'in'을 붙여서 만들었다.

예 부터 조팝나무의 뿌리를 상산(常山) 혹은 촉칠근(蜀漆根)이라 하였는 데, 동의보감에는 '맛은 쓰며 맵고 독이 있다. 여러 가지 학질을 낫게 하 고 가래침을 토하게 하며 열이 오르내리는 것을 낫게 한다'하였다. 또 조 팝나무의 새싹은 촉칠(蜀漆)이라 하여 여러 증상의 학질을 고치는 데 쓰였 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종 5년(1423) 일본사신이 와서 상산 5근과 3근을 두 번에 걸쳐 바쳤다는 기록이 있어서 궁중에서도 쓰이는 귀중한 한약재였음 을 짐작할 수 있다.

전 국 어디에나 자라며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작은 나무이다. 조팝나무 는 사람 키 남짓한 높이로, 손가락 굵기만한 가느다란 줄기가 여럿 모여 집단으로 자란다. 어린 가지는 갈색으로 털이 있으며 잎은 어긋나기로 달 리고 유선형으로 양끝이 뾰족하다. 잎 길이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이며 가 장자리에 잔톱니가 있다. 꽃은 짧은 가지에서 나온 우산모양의 꽃차례에 4-6개씩 달리며 열매는 골돌이라 불린다.

조팝나무 무리에는 이외에도 꽃 모양과 빛깔이 다른 수십 종이 있다. 진 한 분홍빛인 꽃이 꼬리처럼 모여 달리는 꼬리조팝나무를 비롯하여 작은 쟁 반에 흰쌀밥을 소복히 담아 놓은 것 같은 산조팝나무 등이 아름다운 꽃으 로 우리의 산하를 수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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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등나무


등 나무는 주위의 다른 나무들과 피나는 경쟁을 통해 삶의 공간을 확보하 는 것이 아니라, 손쉽게 다른 나무의 등걸을 감거나 타고 올라가 어렵게 확보해 놓은 광합성의 공간을 혼자 점령해 버리는 폭군이다. 칡도 마찬가 지로 선의의 경쟁에 길들여 있는 숲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래서 사람사이의 다툼을 갈등(葛藤)으로 비교하기도 한다.

옛 조선조의 선비들은 등나무의 이와 같은 특성을 대단히 못마땅해 하였 다. 중종 32년(1537) 홍문관 김광진 등이 올린 상소문에 "대체로 소인들은 등나무 덩굴과 같아서 반드시 다른 물건에 의지해야만 일어설 수 있는 것 입니다"라 하여 가장 멸시하던 소인배와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갈등을 빚는 나무이든, 소인배의 나무이든 관념적인 비유일 뿐이 고 등나무만큼 쓰임새가 많은 나무도 드물다.

잎 은 아카시나무와 아주 닮았으나 더 뾰족하고 작으며, 한 여름의 뙤약 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준다. 5월이 되면 연한 보랏빛의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꽃나무로서도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보드라운 털로 덮인 콩 꼬투리 모양의 열매는 너무 짙푸른 등나무 잎사귀의 느낌을 부드 럽게 해주는 액센트이다.

알맞게 자란 등나무 줄기는 지팡이 재료로 적합한데, 영조 41년(1764) 임금이 나이가 들어 걷기가 불편하자 신하들이 만년등(萬年藤) 지팡이를 바쳤다 한다. 덩굴은 바구니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쓰이며 껍질은 매우 억 세고 질겨 새끼를 꼬는데, 또는 키를 만드는 데도 필요한 나무이다.

등나무 이야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등가구에 쓰이는 '등나무'이다. 이 등나무는 외떡잎 식물이며 attan이라는 이름을 가진 열대지방의 나 무로 실제 등나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쉽게 말하여 대나무와 가까운 집안인데 속이 꽉 차있고 거의 덩굴처럼 수십m씩 길게 자라는 것이 대나무 와 다르다.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천연기념물 89호 등나무는 흔히 용등(龍藤)이라 하는데, 애처로운 전설이 전해온다. 신라시대 이 마을에는 마음씨 착한 두 자매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는데 마침 옆집에 늠름하고 씩씩한 청년이 있어 두 자매는 마음속 깊이 청년을 사모하고 있었다.

어 느 날 청년은 변방에 전쟁이 일어나 갑자기 싸움터로 떠나버렸다. 손 꼽아 기다린 보람도 없이 청년이 전사했다는 풍문이 두 자매의 귀에까지 들려오자 두 자매는 마을앞 용림이라는 연못에 몸을 던져버렸다. 다음 해 봄 전에 없던 등나무 두 그루가 연못가에 자라기 시작하였다.

얼마후 죽었다던 그 청년은 훌륭한 화랑이 되어 마을로 돌아왔다. 두 자 매의 사연을 듣고 괴로워하던 그 청년도 어느 달 밝은 밤 연못에 풍덩 뛰 어들어 버렸다.

다 음해 봄이 되자 마땅히 타고 올라갈 나무를 찾지 못하여 바람에 흔들 리기만 하는 두 그루의 등나무 옆에 한 그루의 팽나무가 갑자기 쑥쑥 자라 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등나무는 이 나무를 의지하여 크게 자랐 으며 사람들은 용림에서 자란 등나무란 뜻으로 용등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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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모란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 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리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조지훈의 시 '고사(古寺)'에서처럼 모란은 봄이 무르익어 가는 산사(山 寺)의 대표적인 꽃이다.

화려하고 복스럽게 피는 모란은 예로부터 화왕(花王)이라 하여 꽃 중의 꽃으로 꼽았으며, 아름다운 여인을 흔히 모란꽃 같다고 하듯이 최고의 아 름다움이었고 부귀의 상징이었다.

민 화풍으로 그려진 모란도(牧丹圖)는 혼례용 병풍으로 쓰였으며 고려청 자 상감의 꽃무늬, 분청사기의 꽃, 나전칠기의 모란당초(牡丹唐草), 수놓 은 꽃방석, 와당(瓦當)의 무늬, 화문석의 밑그림까지 모란의 상징성을 살 린 쓰임새는 끝이 없다.

설 총은 모란에 비유한 화왕계(花王戒)라는 설화를 지어 후세의 임금이 덕목으로 삼도록 하였다. "꽃 나라를 다스리는 화왕은 찾아오는 많은 꽃 중에서 아첨하는 장미를 사랑하였다가 뒤에 할미꽃 백두옹(白頭翁)의 충직 한 모습과 충언에 감동하여 정직한 도리를 숭상하게 된다"는 내용이 삼국 사기 열전에 실려있다.

고려 예종17년(1122) 왕이 아끼는 신하들을 불러 모란에 관한 시를 짓게 하였는데, 시 잘 짓기로 명성을 날렸던 강일용은 그 날 따라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아 초고를 소매에 넣고 나가서 대궐 뜰 개천에 쳐 넣어 버렸다 . 왕이 환관을 시켜 가져다가 보고, 다른 사람이 일등을 하였더라도 이는 옛 사람의 말한 바와 같이 "늙은이에게는 온 얼굴에 꽃 장식을 하더라도 서시(西施)의절반 단장만 못하다"는 것과 같다고 그를 위로하여 돌려보냈 다는 고려사 기록이 있다. 임금과 신하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인간미를 보 는 것 같다.

연산10년(1504) 모란 한 송이를 승지들에게 내려보내고 율시를 지어 바 치도록 하였으며, 팔도의 관찰사에게는 품종이 좋은 모란꽃을 올려보내라 고 하였다. 연산군은 모란꽃을 각별히 좋아하여 가까이 있던 신하는 율시 를 짓느라 머리 썩히고, 지방관은 모란이 혹시 잘못될까 봐 전전긍긍하였 다.

이렇게 모란을 노래한 시는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모란꽃이 모두 떨어져 가버린 봄을 아쉬워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모 란은 사람 키 남짓하게 자라고 가지는 굵고 성기게 갈라진다. 작은 잎 은 달걀모양인데 3-5개로 갈라지고 뒷면은 잔털이 있으며 대개는 흰빛이 돈다. 신라 선덕여왕(632-647)때 당나라 태종이 모란꽃 그림과 씨 3되를 함께 보내와서 처음 심게 되었다.

꽃 의 색깔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가 있었으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의 내 용 중에는 '홍모란, 백모란, 정홍모란(丁紅牡丹)'이 등장한다. 조선 인조 23년(1646)에 일본은 '청, 황, 흑, 백, 적모란'을 색깔별로 보내달라고 하 였으나 다른 색깔은 없다고 가장 흔한 적모란만 보내주었다.

동의보감에 보면 모란뿌리는 여자의 월경이 없는 것과 피가 몰린 것, 요 통을 낫게 하며 몸푼 뒤의 모든 혈병(血病), 기병(氣病), 옹창을 낫게 한 다하여 여러 부인병에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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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보리수나무


우 리나라 산길의 어디에서나 흔히 만나는 나무에 보리수란 이름을 달고 있는 나무가 있다. 갸름하게 생긴 잎의 뒷면에 아주 짧은 은빛 털이 촘촘 하여 마치 은박지같은 잎을 달고 있는 자그마한 나무이다. 이 나무는 석가 가 득도하였다는 보리수(菩提樹)와 발음이 같아 불교신자들로부터 격에 어 울리지 않게 대접을 받는다.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서 6년간에 이르는 고행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때 석가가 도를 깨친 나무는 인도보리수로 서 아열대 지방에 자라는 뽕나무무리의 무화과 종류에 포함되는데 높이 30m, 지름이 2m정도나 되는 큰 상록수이다. 인도가 원산지이며 가지가 넓 게 뻗어서 한 포기가 작은 숲을 형성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란다. 이 나무 를 불교에서는 범어로 마음을 깨쳐준다는 뜻의 odhidruama라고 하며 Pip pala 혹은 o라고도 하였는데,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한자로 번역할 때 그대로 음역하여 보리수(菩提樹)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러나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는 진짜 부처님이 도를 깨친 인도보리수는 추워서 자랄 수 없으므로 불교신자들은 대용 나무가 필요하였다. 이에 스 님들은 추운 지방에서도 잘 자라는 피나무를 보리수란 이름을 붙여 널리 심기 시작하였다. 피나무 무리들은 단단하고 새까만 열매가 흔하게 달려서 염주로 쓸 수 있고 잎이 하트모양으로 인도보리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 리나라 절에 보리수, 즉 피나무를 심기 시작한시기는 명확하지 않으 나 고려사에 보면 명종11년(1141) 2월 '묘통사 남쪽에 있는 보리수가 표범 의 울음소리와 같은 소리로 울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적어도 고려 초 이 전부터, 아마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부터 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산에는 불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예로부터 '보리 수'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연산군 6년(1499) '동백나무 5-6그루를 각기 화분에 담고 흙을 덮어 모두 조운선에 실어보내고, 보리수 (甫里樹) 열매는 익은 다음에 봉하여 올려보내라' 하였다.

열 매는 손가락 첫마디만 한데 앵두처럼 붉고 하얀 점이 점점이 있다. 간 식거리로는 충분히 먹을 만하여 임금님에게 진상하였던 것이다. '보리(甫 里)'라는 곳에서 나는 열매나무란 의미로 생각되며 오늘날의 보길도나 노 화도가 아닌가 추정해 본다. 남쪽 섬 지방의 보리수는 세월이 지나면서 보 리장나무, 보리밥나무로 이름이 변해버리고 육지에 있는 비슷한 나무는 그 대로 보리수란 이름으로 남아 절에 있는 보리수와 혼동하게 되었다.

한편 모감주나무, 무환자나무 등 염주를 만들 수 있는 열매를 가진 나무 는 한자로는 흔히 보리수라고도 하여 나무이름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 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절에 심겨진 보리수는 석가모니가 도를 깨친 그때 그 나무가 아니라 피나무 무리의 한 종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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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불두화


메 마른 사막의 선인장도, 진흙구덩이의 연꽃도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긴긴 인고의 세월을 말없이 기다린다. 꽃이란 바로 식물의 생식기 관으로서 암수의 화합이 이루어져 씨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암수가 서로 움직여 짝을 찾을 수 없는 식물의 입장에서는 아름다운 자태에다 향 기를 내고 꿀을 만들어 곤충을 꾀어야 수정이란 단계를 거칠 수 있다.

그런데 암술도, 수술도 갖지 않고 꽃잎만 잔뜩 피우는 멍청이 꽃나무도 있다. 자연적으로 생기기도 하며 사람이 이리 저리 붙이고 떼고 하여 만들 어 내기도 하는데 이름하여 무성화(無性花)이다.

초 파일을 전후하여 대웅전 깊숙이 새하얀 꽃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꽃나무가 있다. 사람 키 남짓한 높이에 야구공 만한 꽃송이가 저들 자신조 차 비좁도록 터질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 꽃나무가 바로 불두화로서 대 표적인 무성화의 하나이다. 자라는 땅의 산도(酸度)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처음 필 때에는 연초록 빛깔이며 완전히 피었을 때는 눈부신 흰색이 되고, 꽃이 질 무렵이면 연보랏빛으로 변한다.

꽃 속에 꿀샘은 아예 잉태하지도 않았고 향기를 내뿜어야할 이유도 없으 니 벌과 나비가 처음부터 외면해 버리는 꽃이다. 매년 5월이 돌아오면 누 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꽃을 피워야 할 계절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살아있 는 꽃'이지만 아무래도 벌과 나비가 없는 불두화는 생명감이 크게 느껴지 지 않는 서글픔이 있다.

다행이 그는 부처님과의 인연으로 석화(石花)의 서러움을조금은 면하게 되었다. 심은 곳의 대부분이 절간이고 꽃의 모양이 마치 짧은 머리카락이 꼬부라져 나발형(螺髮形)을 이루고 있는 불상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불두화 (佛頭花), 혹은 승두화(僧頭花)란 분에 넘치는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씨도 없는 불두화의 자손은 꺾꽂이나 접붙이기로 퍼져나가지만 자신의 조상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백당나무이다. 산지의 습한 곳에서 높이 약 3m 정도로 자라는 작은 나무인데 잎은 마주나고 끝이 3개로 크게 갈라져서 가장자리에 굵은 톱니가 있다.

꽃 은 주먹만한 크기로 작은 우산을 펴놓은 것 같은 꽃차례로 둥글게 달 린다. 안쪽에는 암꽃과 수꽃을 모두 가지는 정상적인 꽃, 즉 유성화(有性 花)가 달리고 바깥쪽에는 새하얀 꽃잎만 가진 무성화가 피어 있어서 달리 보면 전체 모양이 마치 접시를 올려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백당나무에서 돌연변이가 생겼거나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수꽃만 달 리게 육종(育種)한 것이 바로 불두화이다.

북한에서는 백당나무를 접시꽃나무, 불두화를 큰접시꽃나무라고 부른다. 일찍부터 한글전용을 하여온 북한은 아름다운 우리말 식물이름을 많이 만들었지만 백당나무나 불두화가 북한이름보다 꼭 나쁜 이름이라고는 생각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주도에 자라는 나무 중에 중대가리나무란 이름이 있는데 북한 이름은 머리꽃나무이다. 통일의 그 날이 오면 이런 이름들은 그대로 우리 가 따라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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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팝나무


이 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사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 얼마전이었다. 이밥은 이(李)씨의 밥이란 의미로 조선왕 조시대에 벼슬을 해야 비로소 이씨인 임금이 내리는 흰쌀밥을 먹을 수 있 다하여 쌀밥을 이밥이라 하였다.

이 팝나무는 이밥나무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꽃의 여러가지 특징이 이밥, 즉 쌀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팝나무는 키가 20-30m나 자라고 지름 도 몇아름에나 이르는 큰 나무이면서 5월 중순, 아카시아 꽃과 거의 같이 파란 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꽃을 가지마다 소복소복 뒤집어쓰는 보기드문 나무다.

가느다랗게 넷으로 갈라지는 꽃잎 하나하나는 마치 뜸이 잘든 밥알 같이 생겼고, 이들이 모여서 이루는 꽃 모양은 멀리서 보면 쌀밥을 수북이 담아 놓은 흰 사기밥그릇을 연상하게 한다.

꽃이 필 무렵은 아직 보리는 패지 않고 지난해의 양식은 거의 떨어져 버 린 보릿고개이므로 주린 배를 잡고 농사일에 열중하면 헛것으로도 쌀밥이 보일 정도로 힘든 계절이다. 이때 이팝나무 꽃은 쌀밥과 너무나 닮아 있다.

이 름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꽃피는 시기가 대체로 양력 5월5.6일경인 입하(立夏) 무렵이어서 '입하 때 핀다'는 의미로 입하나무로 부르다가 이 팝나무로 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라북도 일부 지방에서는 '입하목'으 로도 부른다니 발음상으로 본다면 더 신빙성이 있는 지 모른다.

그러나 짧게는 수백년 길게는 수천년 전의 우리 선조들이 자연스럽게 붙여놓은 이름을 오늘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말하기는 어렵다. 둘 다 충분 한 이유가 있으며 더더욱 쌀 농사의 흉.풍년과 관계가 있으니 나름대로 음 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경 상북도 남부에서 전라북도의 중간쯤을 잇는 선의 남쪽에 주로 자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만도 8그루나 돼 은행나무, 소나무, 느티나 무에 이어서 네번째로 많은 나무다. 그러나 186호 양산 석계리 이팝나무는 1999년에 죽어 버려 현재는 7그루가 남아 있다.

이외에도 시.도기념물, 보호수로 지정된 이팝나무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이다. 대부분 정자목이나 신목(神木)의 구실을 하였으며 꽃피는 상태 를 보고 한해의 농사를 점쳤다고 한다.

나이가 500년이나 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팝나무는 경남 김해시 주촌면 천곡리 신천리의 천연기념물 307호이다.

이팝나무는 일본과 중국의 일부에도 자라나 세계적으로 희귀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나무를 처음 본 서양인들은 쌀밥을 알지 못하니 눈이 내린 나무로 보아 눈꽃나무(snow flower)라 하였다.

어 린줄기는 황갈색으로 벗겨지나 나이를 먹는 나무의 껍질은 회갈색으로 세로로 깊게 갈라진다. 잎은 마주나기하고 타원형이며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이며 표면에는 매끈한 광택이 있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잎의 모 양이나 크기가 언뜻보면 감나무와 비슷하다. 열매는 콩깍지 모양이고 짙은 푸른색이며 9-10월에 익고 겨울까지 계속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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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철쭉


봄 의 끝자락 5월 중하순에 들어서면 소백산, 지리산, 태백산 등 전국 높 은 산꼭대기에 군락으로 자라는 철쭉은 분홍빛 꽃모자를 뒤집어쓴다. 산기 슭의 큰 나무 그늘부터 바람이 생생 부는 높은 산의 꼭대기까지 어디에나 잘 살아갈 만큼 철쭉은 생명력이 강하다.

진달래와 철쭉종류(철쭉, 산철쭉, 영산홍)는 꽃 모양이 비슷하여 관심 있는 이들도 혼란스러워한다. 우선 진달래는 꽃이 먼저 핀 다음에 잎이 나 오므로, 꽃과 잎이 같이 피는 철쭉 종류와는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철 쭉은 가지 끝에 작은 주걱모양으로 매끈하게 생긴 잎이 너댓장 돌려 나며 꽃빛깔이 아주 연한 분홍빛이어서 오히려 흰 빛깔에 가깝다. 그래서 남부지방에서는 색이 연한 진달래란 뜻으로 '연달래'라고도 한다. 산철쭉 은 잎 모양이 새끼손가락 정도의 길이에 버들잎처럼 길고 갸름하게 생겼으 며 꽃빛깔은 붉은 빛이 많이 들어간 분홍빛이어서 오히려 붉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그러나 영산홍(暎山紅)은 영 복잡하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주로 개량하 여 보급되는 나무이나, 분류학의 체계가 거의 완전히 잡혀 있는 오늘날도 영산홍만은 '개념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고 교과서에도 적혀 있 을 정도다.

모 양새는 산철쭉과 비슷한 품종이 많아 서로 구분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들은 갸름한 좁은 잎사귀에 진달래처럼 생긴 꽃이 피 는 자그마한 나무가 산에 자라면 산철쭉, 정원에 심어진 것은 영산홍으로 아는 수밖에 없다.

옛 사람들은 철쭉을 척촉( )이라하였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나가던 나그네가 자꾸 걸음을 멈추어 철쭉 척( )자에 머뭇거릴 촉( )자를 썼다 하 며, 또 다른 이름인 산객(山客)도 철쭉꽃에 취해버린 나그네를 뜻한다.

삼 국유사에 보면 성덕왕(702-737) 때 순정공(純貞公)의 부인 수로(水路) 는 신라 제일의 미인이었다. 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따라나선 수로부인은 천길 절벽에 매달린 철쭉을 따 달라고 한다. 주위의 모든 사람 이 위험하다고 거절하자 지나가던 노인이 몰고 가던 암소를 팽개치고 절벽 에 기어올라 철쭉꽃을 따다 노래까지 지어 바쳤다.

동 국이상국집에도 철쭉에 대한 시가 실려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철쭉, 영산홍, 일본철쭉이 서로 뒤섞여 여러 번 기록되어 있고, 강희안의 양화 소록에는 세종23년(1441) 봄에 일본에서 철쭉 두 화분을 보내왔다고 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영산홍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산림경제에도 일본 철쭉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즐겨 심고 가꾸는 영산홍이 기록처럼 적어도 조선 왕조 이전에 일본에서 수입된 꽃나무인지, 아니면 우리의 산에 흔히 자라 는 산철쭉이나 철쭉을 말하는 또 다른 이름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철쭉꽃에는 마취성분을 포함한 유독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양(羊)이 철쭉을 잘못 먹으면 죽기 때문에 양척촉(羊 )이라는 이름이 있 다고 본초도감에 적혀 있으며, 음력 3-4월에 꽃을 따서 말린 것을 약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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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찔레꽃


숲 의 가장자리나 돌무더기가 많은 양지 바른 곳에 늦은 봄이면 가느다란 줄기가 길게 늘어지면서 새하얀 꽃이 달리는 가시덩굴이 있다. 목련꽃처럼 너무 크지도, 조팝나무 꽃처럼 너무 작지도 않은 찔레꽃은 5장의 꽃잎에 펼쳐지는 백옥의 향연을 보는 듯하다. 꽃의 질박함이 유난히도 흰옷을 즐 겨 입던 한민족의 정서에도 맞는 우리의 토종 꽃이다.

찔레꽃은 해맑은 햇살을 좋아하지만 우거진 숲 속에서도 조그만 틈만 있 으면 꿋꿋이 피어나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낸다.

"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 삼간 그립습니다. .."라는 흘러간 유행가가 있다. 고향산천과 아련한 유년의 추억을 그림처 럼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그러나 찔레꽃은 붉게 피지 않는다. 아마 해당 화 꽃을 찔레로 착각한 작사자의 탓일 것이다.

가난한 집의 어린이들은 찔레꽃을 꽃으로 감상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배 고픔의 현실이 너무 절박하였다. 보릿고개를 아는 이라면 봄에 돋아나는 연한 찔레순의 껍질을 벗겨 먹었던 일이 아픔으로 남는다. 가벼운 단맛이 있어서 아이들한테 좋은 간식거리가 되었고 요즈음의 눈으로 본다면 비타 민과 각종 미량원소가 들어 있는 찔레순은 어린이의 성장발육에 큰 도움이 된다.

찔레꽃이 필 무렵에는 모내기가 한창인 계절이다. 안타깝게도 이 중요한 시기에 흔히 가뭄이 잘 든다. 그래서 특히 이때의 가뭄을 '찔레꽃 가뭄'이 라고도 한다.

가 을철에 굵은 콩알 크기로 빨갛게 익는 열매는 귀엽고 앙증맞을 뿐만 아니라 영실(營實)이라하여 약으로 쓴다. 동의보감에는 '맛이 쓰고 시며 악성종기, 부스럼, 성병이 잘 낫지 않을 때나 두창(頭瘡), 백반병 등에 쓴 다'고 하였다.

열 매를 소주에 담가서 만든 황금빛의 찔레술(營實酒)은 적당히 신맛이 있다. 꿀이나 설탕을 가미하면 풍미도 일품이며, 향내가 좋아 진귀한 약술 이 된다. 비타민 C가 풍부하며 신장병, 월경불순, 설사 등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찔레 뿌리도 열매와 마찬가지로 약제로 쓰인다.

서양에서는 찔레뿌리로 만든 담배파이프가 유명하다. 최고급 남성용품의 대명사로 꼽히는 던힐의 창업주 앨프리드 던힐(A.Dunhill)은 35세 때인 1 907년 런던 듀크가(街)에 담배 가게를 열면서 찔레뿌리로 아름답게 수가공 (手加工)한 파이프를 만들어냄으로써 명성을 떨치는 계기를 잡았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는 낙엽활엽수 관목으로 키가 2m정도이나 가지 끝이 밑으로 처져서 덩굴 모양을 한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작은 잎이 5-9개로 이루어진다. 작은 잎은 메추리알 크기만 하고 타원형이며, 양끝이 좁고 길 이 2-3cm로 톱니가 있다. 빗살 같은 톱니를 가진 탁엽이 잎자루와 합쳐진 다. 꽃은 새 가지 끝에 원뿔모양의 꽃차례로 달리고 5월부터 피기 시작하 며 지름 2cm정도로 흰빛이나 연분홍 빛으로 핀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맛을 주는 조경수로 적당하나 찔레를 담장에 올리 면 상을 당한다고 하여 생울타리로는 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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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때죽나무


오월 중순이 지날 즈음, 층층이 뻗은 자그마한 나무 가지의 짙푸른 잎사 귀 사이에 새하얀 꽃들이 2-5개씩 뭉쳐서 줄줄이 아래로 매달려있는 꽃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바로 이름도 귀여운 때죽나무이다.

개개의 꽃은 엄지 첫 마디만하고 작은 종(鐘) 모양으로 앙증맞게 생겼다. 절에서 흔히 보는 동양의 범종과는 달리 윗부분은 원통형에 가깝고 입이 크게 벌어진 서양 종의 모양이다.

다섯 장의 새하얀 꽃잎으로 감싼 노랑 수술은 끈을 매달아만 놓아도 산 들바람으로 부딪혀 금세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질 것 같다. 그래서 영어로 는 'snowbell'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하다.

대 부분의 꽃들이 하늘을 향하여 태양을 마주보고 '나 얼마나 예뻐요?'하 듯 뽐내는데 여념이 없으나, 때죽나무 꽃은 치마꼬리 살짝 잡고 생긋 웃는 수줍은 옛 처녀 마냥 다소곳이 땅을 향하여 피어 있다. 멀리서는 백옥 같 은 꽃잎의 옆모습밖에 볼 수 없으니 꼭 앞 얼굴을 보고 싶은 이는 나무 밑 에 들어와서 살짝 쳐다보라는 뜻이다.

가 을이 무르익어 가면 크기가 손가락 첫 마디만하고 아래위가 약간 뾰족 한 열매가 처음 달릴 때는 초록색으로 시작하여 갈색으로 익어가는 모양이 너무 귀엽고 깜찍하다. 여기에는 유지(油脂)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예부터 동백나무가 자라지 않은 북쪽지방에서는 등유나 머릿기름으로 이용 되었다.

열매나 잎 속에는 사포닌을 주성분으로 하는 마취성분이 들어 있어서 이 를 찧어 물에 풀면물고기는 순간적으로 기절해 버린다. 간단히 고기잡이 에 쓰였으나 사람도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구토를 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하 여야 한다.

최 근 오염환경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식물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때죽나 무는 공해물질의 배출이 많은 공장 가까이서도 잘 자라는 대표적인 나무이 다. 예쁜 꽃과 열매를 감상할 수 있고 공해에도 잘 견디는 때죽나무에 우 리 모두 관심을 가져 볼만하다.

때죽나무의 속살은 너무 해맑고 깨끗하며 세포의 크기와 배열이 거의 일 정하여 나이테 무늬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유빛 아름다운 피부 만을 곱게 내보인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빗물을 깨끗이 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가 로수로 적당한 나무가 우리나라에는 없다고 버즘나무, 은단풍, 튤립나 무 등 외래종 나무심기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때죽 나무처럼 청초한 흰 꽃과 귀여운 열매, '몽당비'처럼 자르지 않아도 적당 한 크기로 자라는 등 가로수로 알맞은 '토종 우리나무'가 얼마든지 있다.

쪽동백나무는 때죽나무와 같은 무리에 속하는 친형제 나무이다. 옥령화 (玉鈴花)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때죽나무와 비슷하지만 잎 모양과 꽃이 달리는 차례가 다르다. 잎은 거의 둥글고 크기가 손바닥을 편 것 만 하며 꽃은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20여개씩 달리는 것이 쪽동백나무, 잎은 타원형이고 작으며 꽃은 2-5개씩 달리는 것이 때죽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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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함박꽃나무


꽃 모양이 한약재로 널리 쓰이는 작약, 즉 함박꽃과 너무 비슷하여 나무 에 피는 '함박꽃'이란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함박꽃나무와 목련(木 蓮)은 식물학적으로도 한 식구이고 꽃이나 잎 모양이 매우 닮았으며 주로 산 속에 자라므로 흔히 함박꽃나무는 산목련이라고도 부른다.

북한의 국화는 진달래로 알고 있었으나 최근 함박꽃나무, 그들의 이름으 로는 목란(木蘭)임이 알려졌다. 목란은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하던 시절에 처음 발견하였으며 이름도 없었는데 60년대 후반 직접 목란이란 이름을 지 어 붙였다고 한다.

그 이후 목란은 귀중한 나무로 취급 받았으며 91년 4월에 공식적으로 국 화로 지정했다. 김일성 저작집 16권에도 '우리나라에 있는 목란이란 꽃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향기도 그윽하고 나뭇잎도 보기가 좋아서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입니다'하여 심기를 장려한 것 같다.

김일성과 연관이 있는 북한의 대형 건축물에는 대부분 목란꽃 문양이 들 어있다. 금수산 의사당 밑바닥, 혁명사적지를 비롯하여 95년 8월에 판문점 북측지역에 세워진 김일성의 친필비석에도 그의 사망 당시 나이를 상징하 는 82송이의 목란꽃이 새겨져 있다 한다.

또 각종 공문서의 바탕에는 우리나라가 무궁화 그림을 넣는 것처럼 목란 꽃이 연하게 깔려있고, 평양 창광거리에서 최고시설을 자랑하는 종합연회 장도 목란관이다. 가극 '금강산의 노래'에서도 목란은꽃 중의 꽃으로 숭 상하고 있다.

그 러나 김일성이 처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신격화의 일단일 따름이고 산목련, 함백이, 개목련, 함박꽃나무란 이름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나무이다. 자라는 곳이 인가 근처가 아니라 깊은 산 계곡이므로 사람들 눈 에 잘 띄지 않았을 따름이다.

목란이란 원래 목련의 다른 이름으로 불려 왔으나, 이제는 북한이 이미 붙여둔 이름이니 함박꽃나무와 함께 사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목 련은 꽃이 먼저 핀 다음 잎이 나오나 함박꽃나무는 잎이 다 펼쳐진 다 음 꽃이 핀다. 꽃은 늦봄에서 초여름에 새 가지 끝에 달리며 6장의 하얀 꽃잎으로 둘러 쌓인 수술은 붉은 빛을 띤 보라색이다. 자칫하면 크다란 초 록색 잎사귀에 묻혀 심심해져 버릴 하얀 꽃에 악센트를 주며 꿀을 따는 벌 을 위하여 은은한 향기도 내뿜는다.

꽃은 당당하게 하늘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곳이 땅을 향하여 피는 모양은 소복 입은 청상과부의 조심스런 몸가짐에서 풍기듯 깔끔하고 정갈 한 느낌이다.

전 국의 산골짜기 숲 속에 자라는 작은 나무로서 키가 7-10m, 굵기는 발 목 굵기 정도가 고작이다. 줄기는 여러 포기가 나와 비스듬하게 자라는 경 우가 흔하고 껍질은 회색이며 갈라지지 않는다. 잎은 어린아이 손바닥만하 고 감나무 잎처럼 생겼으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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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앵두나무


이름으로 앵도나무와 앵두나무 양쪽을 다 쓴다. 그러나 한자 이름에서 온 앵도(櫻桃)나무가 더 맞는 이름이다. 또 열매는 꾀꼬리가 먹으며 생김 새가 복숭아와 비슷하기 때문에 앵도(鶯桃)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잘 익은 앵두의 빛깔은 붉음이 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티 없이 맑고 깨끗하여 바로 속이 들여다보일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빨간 입술과 흰 이를 아름다운 여인의 기준으로 삼았던 옛 사람들은 예쁜 여인 의 입술을 앵두같은 입술이라 하였다.

흔히 우리는 사람의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고 입술은 관능의 창이라 한다. 표면에는 자르르한 매끄러움마저 있으니 작고 도톰한 입술이 촉촉이 젖어있는 매력적인 여인의 관능미를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조 선초기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는 세종이 앵두를 좋아하였으므로 효 자인 문종은 세자시절 경복궁 안 울타리마다 손수 앵두를 심고 따다 바쳤 다. 세종이 맛보고 '다른 곳에서 바친 앵두가 맛있다 하여도 어찌 세자가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느냐'고 무척 흐뭇해하였다고 한다.

성종25년(1492) 철정이란 관리가 임금께 앵두를 바치자, '성의가 가상 하니 그에게 활 1장을 내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 관리는 연산3년(149 6)에도 또 임금께 앵두를 바쳐 각궁(角弓) 한 개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억! 억! 하는 돈을 내놓고도 권력자의 눈 밖에나 하루아침에 망해버 린 어느 기업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앵두 한두 쟁반에 임금님의 환심을 살 수 있었던 그 때그 시절을 부러워 할 것 같다.

앵 두는 단오 전후 모든 과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익기 때문에 고려 때부 터 제물(祭物)로도 매우 귀하게 여겼고, 약재로도 쓰였다. 동의보감에 는 '중초(中焦)를 고르게 하고 지라의 기운을 도와주며 얼굴을 고와지게 하고 기분을 좋게 하며 체하여 설사하는 것을 멎게 한다'고 하였다.

또 앵두나무 잎은 뱀에게 물렸을 때 짓찧어 붙이고, 동쪽으로 뻗은 앵두 나무뿌리는 삶아서 그 물을 빈 속에 먹으면 촌충과 회충을 구제할 수 있다 고 하였다.

앵 두나무는 수분이 많고 양지 바른 곳에 자라기를 좋아하므로 동네의 우 물가에 흔히 심었다. 고된 시집살이에 시달린 한 많은 옛 여인네들은 우물 가에 모여 앉아 시어머니로부터 지나가는 강아지까지 온 동네 흉을 입방아 찧는 것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였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로 시작되는 유행가 가사처럼 공업화가 진행된 70년대 초, 소문으로만 듣던 서울로 도망칠 모의(?)를 한 용감한 시골 처녀들의 모임방 구실을 한 것도 역시 앵두나무 우물가이었다.

중 국 화북 지방이 원산지이고 사람 키를 조금 넘기는 정도로 자라는 작 은 나무이다. 어린 가지에 곱슬곱슬한 털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모양 이며 가장자리에 가는 톱니가 있고 손가락 길이 정도이다. 4월에 잎보다 먼저, 또는 새잎과 거의 같이 엄지손톱 만한 꽃이 새하얗거나 연분홍색이 으로 1-2개씩 모여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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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산딸나무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은 어디 가고 백골만 묻혔느냐 잔 들어 권할 이 없어 그를 서러워 하노라."

조선 중기의 문신 임제(林悌, 1549-1587)가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부임 하는 길에 황진이의 묘를 찾아 읊조린 시 한 수이다.

산 딸나무는 붉은 흙이 그냥 보이는 야산에 자라지 않는다. 지리산 달궁 계곡이나 무주구천동 등 '청초 우거진' 깊은 산골의 숲 속에서 다른 나무 들에게 시달리면서 자란다. 온통 초록의 바다 속에서 산딸나무는 어디에 묻혀 있는지 눈 씻고 보아도 찾아내기 어렵다.

그러나 녹음이 짙어 가는 초여름에 들어서는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진 예쁜 스타처럼 사람들을 눈부시게 한다. 진한 초록의 잎새로 호위를 받으 면서 새하얀 꽃이 마치 층을 이루듯이 무리 지어 피므로 멀리서 보아도 청 초하고 깨끗한 자태를 금세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숭아꽃, 살구꽃 등 흔히 보는 꽃들은 대부분 꽃잎이 5개씩 달리는 것 과는 달리 산딸나무 꽃잎은 4장이 달린다. 엄밀히 말하면 순수한 꽃잎이 아니라 잎이 변하여 꽃잎처럼 보일 따름이다.

이들은 크기가 엄지손가락만 하고 처음에는 연초록이나 완전히 피면 새 하얗게 되며 꽃이 질 무렵에는 끝 부분이 붉은 자주빛으로 변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하트모양으로 두 장씩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십자가(十字架) 모양을 이룬다.

예 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쓰인 나무는 무엇일까. 믿음에 가까이 가 지 못한 보통사람들은 쓸데없이 이런 일에나 관심이 많다. 올리브나무일 것이라고도 하나 우리나라의 산딸나무와 비슷한 종류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영어로 산딸나무를 포함한 층층나무 무리를 Dogwood라고 하는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이 나무를 연상하게 한다.

굵 은 산딸나무 목재를 켜서 대패질한 나무표면을 보면 이 나무가 예수님 과 감히 관련을 지울 만큼 성스러운 나무인지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속살은 트레이드마크인 하얀 꽃잎을 연상할 만큼 맑고 깨끗하다. 꽃과 나 무결 모두 해맑은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보고 있는 듯한 품격 높은 나무이 다.

중부 이남에 자라는 큰 나무로서 숲 속에서는 한 아름이 넘게 자라기도 한다. 가지 퍼짐은 사촌뻘 되는 층층나무를 닮아 층을 지어 수평으로 뻗어 나간다. 나무 껍질은 회갈색으로 나이를 먹어도 갈라지지 않고 매끄러우며 큰 얼룩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잎은 마주 나고 갸름하게 생겼으며 달걀크기 만하다. 잎맥이 활처럼 휘 어서 잎 끝으로 몰리는 형태이며 가장자리는 밋밋하거나 잔물결모양의 톱 니가 있다.

가 을이 되면 우리가 흔히 먹는 딸기와 비슷하게 생긴 열매가 진분홍색으 로 익는다. 달콤하고 육질이 많아 먹을 수 있다. 산딸나무라는 이름은 이 열매의 모양이 딸기를 닮았기 때문이다. 나무는 단단하고 질기므로 방적용 북의 재료를 비롯하여 농기구, 자루, 망치, 절구공이 등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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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밤나무


여름의 발걸음이 차츰 빨라지는 6월 중순쯤 윤기 자르르한 초록 잎이 달 린 큰 나무에 잿빛 가발을 쓴 것 같은 밤꽃은 산자락에서 쉽게 눈에 띈다.

꽃 이 한창 피어 있을 때 코끝을 스치는 꽃 냄새는 향기로움으로 가득 찬 다른 꽃들과는 달리 살짝 쉬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맡으면 시큼하기 도 한 묘한 냄새가 난다. 바로 인간 생명의 근원인 남자의 정액냄새와 영 락없이 같단다. 그래서 이 냄새를 부끄러워한 옛 부녀자들은 밤꽃이 필 때 면 외출을 삼갔고 과부는 더욱 근신하였다 한다.

그러나 꽃이 흐드러지게 많이 피고 꿀을 충분히 갖고 있어서 밤꿀을 생 산하는 꽃이기도 하다.

밤 속에는 전분과 단백질이 풍부하고 달큼함을 느낄 만큼의 당분도 들어 있어서 예부터 식량자원으로 재배를 장려하였으며 낙랑고분 및 가야고분에 서도 밤알이 출토된 바 있다.

밤은 제물(祭物)로서도 중히 여긴다. 밤알이 보통 3개씩 들어 있으므로 후손들이 출세의 대명사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대표되는 3정승을 온 집안에서 나란히 나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보다 구체적인 해석은 밤이 싹이 틀 때의 모양에서 찾는다. 밤 껍질을 땅속에 남겨두고 싹만 올라오는데, 껍질은 땅 속에서 오랫동안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는 까닭에 밤나무는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는 나무라고 알려 져 있다.

밤송이는 '고슴도치야 게 섰거라' 할 만큼 완벽해 보이는 방어구조를 갖 고 있다. 날카로운 침만으로도 충분하련만 안에는 두껍고 단단한 껍질로 싸고그 안에는 또다시 떫은맛이 잔뜩 든 안 껍질이 있다.

천 려일실(千慮一失)이랄까? 이렇게 어마어마한 방비를 하고도 벌레침입 을 억제하는 물질을 껍질에 살짝 섞어두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생밤 을 치다 보면 토실토실(?) 살이 오른 밤벌레에 사람들은 질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밤을 수확할 무렵부터 껍질에 붙어 있던 벌레 알이 보관 과정 에 부화되어 껍질을 뚫고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진한 소금물을 만들 어 4~5일 담가두었다가 꺼내어 얼지 않는 음지에 모래와 함께 묻어두면 다 음 해 까지도 밤벌레 공포 없이 보관할 수 있다.

밤나무 목재는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조상숭배의 상징성 때문에 사당의 위패(位牌), 제상(祭床) 등 조상을 숭배 하는 기구의 재료로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가장 널리 쓰였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며 지름이 두세 아름까지 이르기도 한다. 경산 임당 의 신라초기 무덤에서 밤나무로 만들어진 나무 관이 나온 것으로 보아 옛 날에는 더 널리 쓰인 것 같다.

갸 름하고 길쭉하게 생긴 잎 가장자리의 톱니 끝은 짧은 침처럼 생겼다. 꽃이나 밤이 아직 달리지 않은 숲 속의 밤나무는 상수리나무와 잎 모양이 비슷하여 찾아내기 어렵다. 밤나무는 녹색의 엽록소가 잎 가장자리 침 끝 까지 들어있어서 침이 파랗게 보이는데 비하여 상수리나무의 잎 침에는 엽 록소가 들어 있지 않으므로 연한 갈색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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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모감주나무


녹 음이 짙어 가는 6월말이나 7월초가 되면 화려한 꽃으로 우리를 유혹하 던 나무들은 짙푸른 잎으로 뒤덮여 지난 꽃 세월은 흔적도 없어져 버린다. 이때쯤 진한 노랑꽃이 임금님의 왕관을 길게 장식하는 깃털 마냥 우아하 게 꽃대가 올라와 자그마한 꽃들이 줄줄이 달리는 나무가 바로 모감주나무 이다. 따가운 여름 태양에 너무 바래버린 듯 모감주나무의 꽃은 노랑꽃이 라고 하기 보다 오히려 고고한 금빛에 가까워 동화 속의 황금궁전을 연상 시키는 꿈의 꽃이다.

꽃대의 아래는 길이가 한 뼘이나 되는 잎자루에 아카시아 잎 마냥 작은 잎이 10-15개 씩 다닥다닥 달려있다. 가장자리에는 크고 깊은 톱니가 나 있는 잎이 약간 탁한 푸르름을 갖고 있어서 금빛 꽃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작 열하는 여름 태양과 경쟁하듯 버티고 있던 수많은 황금 꽃은 수정이 되고 나면 세모꼴 초롱모양의 앙증맞은 열매가 익어 가는 가을과 함께 크 기를 부풀려간다. 햇달걀크기 만큼이나 부풀려지면 얇은 종이 같은 껍질이 셋으로 길게 갈라지면서 속에는 금빛 꽃과는 엉뚱하게 새까만 씨앗 3개가 얼굴을 내민다.

굵은 콩알만하고 윤기가 자르르한 이 씨앗은 완전히 익으면 돌처럼 단단 해진다. 만질수록 손때가 묻어 더욱 반질반질해지므로 염주(念珠)의 재료 로 안성맞춤이다. 그것도 감질나게 몇 개씩 달리는 것이 아니라 54염주는 물론 108염주도 몇 꾸러미를 만들 수 있을 만큼 풍부하게 매달린다.

모감주나무의 씨앗은 금강자(金剛子)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금 강이란 말은 금강석의 단단하고 변치 않은 특성에서 유래되었겠으나 불가 (佛家)에서는 깨달은 지덕이 굳고 단단하여 모든 번뇌를 깨뜨릴 수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고려 숙종4년(1099) 임금은 상자사(常慈寺)에 머물면서 금강자와 수정염 주 각 한 꾸러미를 시주하였다 하고, 조선 태종6년(1406)에는 명나라 사신 이 금강자 3관을 예물로 바쳤다 하며 태종9년(1409)에도 기록이 있다. 이 처럼 예부터 왕실에서도 사용하는 귀중한 염주재료임을 알 수 있다.

염주를 만드는 구슬은 피나무 열매, 무환자나무 열매, 율무, 수정, 산 호, 향나무 등도 사용하나 금강자 염주는 큰스님들도 아끼는 귀한 애장품 이었다.

모 감주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서 우람한 모양새를 자랑하는 나무는 아니 지만 단아한 가지 뻗음과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한 잎, 황금 깃처럼 솟아오 른 금색 꽃, 초롱 속의 새까만 열매 , 가을에 만나는 루비빛 혹은 연노랑 단풍 등 다른 나무가 엿보기 어려운 독특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은 도로 옆이나 공원 녹지대의 조경수로 흔히 심는다.

옛날 중국에서는 임금에서 서민까지 묘지의 둘레나무로 심을 수 있는 나 무를 정해주었는데, 학덕이 높은 선비가 죽으면 모감주나무를 심게 할 정 도로 품위 있는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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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자귀나무


초 여름의 숲 속에서 짧은 분홍 실을 부챗살처럼 펼쳐 놓은 자그마한 꽃 들이 피어 주위를 압도하는 꽃나무가 있다. 길쭉길쭉한 쌀알처럼 생긴 잎 들이 서로 마주 보면서 깃털모양으로 촘촘히 달려있는 모양도 특별한 나무 가 바로 자귀나무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소가 특히 잘 먹는다 하여 소밥나 무 혹은 소쌀나무라고도 한다.

자귀나 무란 자는데 귀신같은 나무를 줄인 이름인가?.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상당한 근거가 있다. 초등학교 앞 노점 판의 인기품목이었던 미모 사(신경초)를 건드리면 금새 벌어져 있는 잎이 닫혀버리는 모양을 기억하 고 있을 것이다. 이는 광합성을 할 때 이외에는 잎을 닫아 버려 날아가는 수분을 줄여보자는 대책이다. 자귀나무는 경망스럽게 건드리는 정도로 일 일이 반응은 아니하고 긴 밤이 되어야 서로 마주 붙어 정답게 깊은 잠이 들어 버린다.

재 미있는 것은 50-80개나 되는 작은 잎이 짝수로 이루어져 있어서 서로 상대를 찾지 못한 홀아비 잎이 남지 않는다. 따라서 합환수(合歡樹) 혹은 야합수(夜合樹)라 하여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는 뜻으로 정원에 흔히 심는 다. 그러나 대낮에는 두꺼운 구름이 끼여 아무리 컴컴해도 잎이 서로 붙지 않는다. 자귀나무 잎의 수면운동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절제된 부부생활을 하라는 깊은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지도 모른다.

옛날 중국의 두양이라는 선비의 부인은 말린 자귀나무 꽃을 베개 속에 넣어 두었다가, 남편의 기분이 언짢아 하는 기색이보이면 조금씩 꺼내어 술에 넣어서 한잔씩 권했다. 이 술을 마신 남편은 금세 기분이 풀어졌으므 로 부부간의 사랑을 두텁게 하는 신비스런 비약으로서 다투어 본받았다 한 다.

또 겨울이 되면 콩꼬투리처럼 생긴 긴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서 수없이 달리는데, 세찬 바람에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옛 양반들의 귀에 꽤 나 시끄럽게 들렸나 보다. 그래서 여설수(女舌樹)란 이름도 붙여 두었다. 물론 조선조 제일의 석학 퇴계 이황마저 '무릇 여자란 나라이름이나 알고 이름석자나 쓸 줄 알면 족하다'고 일갈하여도 무방하던 시절에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껍 질은 합환피(合歡皮)라 하여 동의보감에 보면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며 근심을 없애서 만사를 즐겁게 한다고 한다. 또 민간에 서는 갈아서 밥에 개어 타박상, 골절, 류머티즘에 바르면 잘 듣고 나무를 태워 술에 타서 먹으면 어혈 등에 효과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황해도 이남에 주로 분포하며 그렇게 크게 자라지는 않으나 깊은 산 속 에서는 키가 10여m에 이르기도 한다. 나무껍질은 갈색바탕에 녹색이 들어 간 색깔인데 나이를 먹어도 흉하게 갈라지지 않고 다만 작고 동글동글한 숨구멍만 촘촘히 생긴다. 잎자루는 가지에 어긋나기로 붙어 있는데, 큰 잎 자루에서 또 한번 더 갈라져서 두 번 갈라진 셈이 된다. 줄기가 굽거나 약 간 드러눕는 모양이어서 목재로서의 큰 가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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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이야기] 초피나무


' 이름없는 들꽃, 이름없는 나무'. 주변에서 흔히 보는 토종 식물을 우리 는 흔히 이렇게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 들꽃과 나무에겐 모두 이름이 있 다. 단지 우리가 그 이름을 모를 뿐이다. 나무의 이름과 용도도 모른 채 나무를 사랑하고 자연과 국토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영남일보는 우리나라의 산과 들에 자생하는 각종 나무 100여종을 선정, 국내 임산공학 분야의 대가인 경북대 박상진 교수(임산공학과)의 해설로 그 나무의 특징과 쓰임새, 얽힌 이야기 등을 연재한다. 우리의 산하와 자 연이 새롭고 중요한 의미로 독자에게 가깝게 다가가는 계기가 될것으로 기 대한다.

편집자 주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면 여름 내내 살이 오른 미꾸라지를 푹 고아 만든 추어탕의 감칠 맛을 잊지 못한다. 문제는 비린내. 전라도 쪽에서는 된장을 풀고 경상도에서는 초피(조피, 제피, 쟁피, 죄피) 가루를 넣어 해결한다.

그 래서 고즈넉한 시골동네의 밭둑에는 한두 그루의 초피나무가 심겨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가을에 종자를 따다가 절구로 빻아서 쓰며 까만 알갱 이보다는 종자 껍데기에 향기가 더 있다. 깜박 초피가루 준비를 잊어버린 아낙은 잎사귀를 듬성듬성 썰어 넣어도 비린내를 없애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초피나무는 조피나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산초나무가 이 와 비슷해서사람들은 흔히 혼동한다. 그러나 추어탕에 넣을 셈이라면 산 초나무 열매로는 톡 쏘는 독특한 맛을 얻지 못한다.

산 초나무에도 향기가 있으나 초피나무보다 훨씬 약하여 향신료로 쓸 때 는 역시 초피나무라야 한다. 초피를 추어탕에 쓰는 것은 주로 경상도 지방 이므로 산에서는 임금님 만나기 보다 어렵다. 반대로 전라도나 충청도 쪽 으로 가면 초피나무가 오히려 더 많다.

어 떻게 구분할까? 조금만 주의깊게 보면 금세 찾아낼 수 있다. 우선 초 피나무는 가시가 서로 마주나고 잎이 동그스름하며 가장자리가 잔잔한 물 결모양이다. 이에 비하여 산초나무는 가시가 어긋나며 잎은 끝이 뾰족해지 면서 길쭉하고 가장자리는 톱니모양을 하고 있다.

간단하게 구별해 가시가 마주나면 초피나무, 어긋나면 산초나무로 보면 된다. 초피나 산초는 가지 끝마다 한꺼번에 수 십 개씩 달리므로 다산(多 産)의 의미를 갖는다. 중국에서는 왕비의 거실을 초방(椒房)이라 하였으며 연산군이 궁녀를 자꾸 맞아들여 말썽이 나자 아부 잘하는 신하가 '산초 열 매가 번성하여 되에 가득하다는 말이 있다'고 임금의 후궁 맞이를 옹호하 였다.

한방에서는 건위제, 구충제, 염증약, 이뇨제 등으로 널리 사용한다. 또 최근에는 초피에서 O-157를 비롯한 비브리오균을 억제하는 효과가 밝혀지 고 있어 더더욱 우리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물푸레나무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란 뜻으로 물푸레나무라고 불린다. 실제로 가지를 꺾어 하얀 종이컵에 맑은 물을 받아 살그머니 담가보면 가을 하늘이 연상 되는 맑고 파란 물이 우러난다.

동 의보감에는 물푸레나무 껍질을 진피(秦皮)라 하여 눈병 약으로 쓰고 있는데 '두 눈에 핏발이 서고 부으면서 아픈 것과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계속 흐르는 것을 낫게 한다. 우려내어 눈을 씻으면 정기를 보하고 눈을 밝게 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 이 나무는 질기고 휨이 좋아 도리깨 등의 농사용 도구에 쓰였고 옛 서당의 훈장은 물푸레나무나 싸리나무 회초리로 아이들의 게으름을 다스렸 으며, 죄인을 신문할 때 몽둥이로도 사용한 기록도 있다.

조 선왕조 예종때 형조판서 강희맹이 임금께 올린 글에는'지금 사용하는 몽둥이는 그 크기가 너무 작아 죄인이 참으면서 조금도 사실을 자백하지 않으니, 이제부터 버드나무나가죽나무를 없애고, 단지 물푸레나무만을 사 용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있다.

눈 이 많이 오는 강원도의 산간지방에서는 눈 속에 빠지지 않은 덧신으로 서 설피를 만들어 쓰는 재료이기도 했다. 서민에게는 관청에 불려가 매맞 을 때도, 고달픈 삶을 이으려 눈 위를 오갈 때도 애환을 함께 한 나무가 물푸레나무이었다.

오늘날에는 통쾌한 홈런을 날리는 이승엽의 야구방망이, 테니스채 등 운 동구 재료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

우 리나라의 어디를 가나 산 속의 작은 개울가에 아름드리로 자라는 큰 나무이다. 달걀모양으로 생긴 잎이 하나의 잎자루에 대여섯 개가 붙어있으 며 서로 마주난다. 열매는 길이나 너비가 싸인펜 뚜껑만 한데 주걱모양으 로 날개가 붙어있고 한꺼번에 수십개씩 무더기로 달린다.

비슷한 나무에 들메나무가 있으며, 쓰임새는 거의 같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붉나무 (鹽膚木,木鹽,五倍子樹)


나 무이름은 붉은 단풍이 드는 나무란 뜻으로 붉나무가 되었다. 단풍이라 면 단풍나무만 연상하지만 곱게 물든 붉나무의 단풍을 한번만 보면 왜 이 름을 붉나무라고 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만큼 그 진한 붉음이 우리를 감탄 케 하는 나무이다.

개 화 이전의 우리네 서민들의 풍물을 그린 글에는 소금장수 이야기가 빠 지지 않는다. 그 만큼 소금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생필품이었으며, 특히 산골에 사는 사람들은 어쩌다가 나타나는 소금장수 한테서 잊지 않고 소금을 확보해 두어야만 하였다.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 봉상왕의 조카 을불(乙弗)은 왕의 미움을 받아 소금장수로 떠돌아다니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왕을 몰아내고 15대 미천왕(300~336)이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남아있는 가장 오랜 소금장수 이야기이고 가장 출세한 소금장수이다. 그 만큼 옛날 소금장수는 없어서는 안될 '귀하신 몸'이었으며, 특히 더벅머리 총각 소금장수는 시골처녀들을 가슴설레게 하였다 한다.

그 런데 가진 소금은 바닥나고 소금장수도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였을 까? 바닷물을 정제한 소금을 구할 수 없을 때 대용으로 염분을 구하려는 우리 선조 들의 노력은 정말 눈물겨웠다. 특정의 벌레에서 염분을 얻는 충 염(蟲鹽), 신나물을 뜯어 독 속에 재어두어서 얻는 초염(草鹽), 쇠똥이나 말똥을 주워 다가 이를 태워서 얻는 분염(糞鹽) 등 이름만 들어도 소금을 얻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붉나무 열매에서 소금을 얻는 것이 가장 간편하고 효율적이었다. 붉나무 열매는 가운데에 단단한 씨가 있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과육에 해당하는 부분이 가을이 깊어 갈수록 소금을 발라놓은 것처럼 하얗게 된다. 여기에는 제법 짠맛이 날 정도로 소금기가 들어 있는데 긁어모아두면 훌 륭한 소금대용품이 된다. 한자로 염부목 혹은 목염이라 하는 것은 붉나무 의 열매가 소금으로 쓰인 것을 나타낸다.

또 붉나무에는 오배자(五倍子)라는벌레 혹이 달리는 데 타닌을 50-70% 나 함유하고 있으며, 가죽 가공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원인 동시에 약 제였다. 붉나무에 기생하는 오배자 진딧물이 알을 낳기 위하여 잎에 상처 를 내면 그 부근의 세포가 이상분열을 하여 혹 같은 주머니가 생기고 오배 자 진딧물의 유충은 그 속에서 자라게 되는데 이 주머니를 오배자라 한다.

동 의보감에 보면 오배자 속의 벌레를 긁어 버리고 끓은 물에 씻어서 사 용하는데, 피부가 헐거나 버짐이 생겨 가렵고 고름 또는 진물이 흐르는 것 을 낫게 하며 어린이의 얼굴에 생긴 종기, 어른의 입안이 헌 것 등을 치료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에는 토산물로서 붉나무 벌레 혹을 생산하는 지 역이 원주, 평창, 양양, 정선, 강릉이라 하여 약제로 널리 쓰였음을 짐작 케 한다.

오늘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한낱 평범한 붉나무도 한때 사랑을 독차지하였던 영광의 세월을 말없이 되뇌어 보고 속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 렇게 높지 않은 산자락의 양지 바른쪽이면 우리나라 어디에나 잘 자란 다.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나무로서 크게 자랐을 때는 지름이 10여cm에 이 르기도 한다. 잎은 어긋나 달리는 데 하나의 잎자루에 7-13개의 작은 잎 이 서로 마주 보면서 붙어있다. 잎자루의 좌우에는 좁다란 날개가 붙어 있 는 것이 특징이다.

흔 히 혼동하는 옻나무나 개옻나무는 잎자루에 이런 날개가 없으므로 조 금만 관심 있게 보면 금세 구분할 수 있다. 작은 잎은 타원형이며 끝이 차 츰 뾰족해지고 가장자리에 드문드문 톱니가 있다. 꽃은 암수 다른 나무이 고 가지의 꼭대기에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달리고 8월에서 9월에 걸쳐 연한 노랑 빛의 꽃이 핀다. 꽃이 지면 속에 단단한 종자가 들어있는 열매가 지 천으로 달리는 데 황갈색의 잔털로 덮여 있다. 익으면 맛이 시고 짠맛이 도는 흰빛 육질이 생긴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싸리나무


싸리나무는 광주리, 바구니를 비롯한 생활용구에서 서당 훈장님의 회초 리, 나아가서는 명궁으로 유명한 이태조의 화살대로 애용되는 등 옛 선조 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나무였다.

또 귀중한 쓰임새는 어두운 밤을 밝혀주는 횃불의 재료이다. 요즘 TV의 역사극을 보면 기름 묻힌 솜뭉치 횃불이 등장한다. 그러나 들깨나 쉬나무 열매에서 어렵게 기름을 얻어 호롱불로나 간신히 사용하던 그 시절에 늘 솜뭉치에 쓸만한 기름은 아무리 왕실이라 하더라도 조달이 가능하지 않다. 소나무 관솔도 일부 사용하였을 것이나 싸리나무가 가장 보편적이었다.

성 종이 죽자 연산 원년(1495) 장례절차를 논의하는 과정을 보면, "발인 할 때에, 도성에서 전곶까지는 사재감에서 싸리 횃불을 장만하여 노비에게 들리게 한다"하여 횃불의 재료로 궁중에서 널리 이용하였음을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얼 마 전까지만 해도 훈련 나간 군인이 싸리나무를 모르면 생쌀 먹기가 일쑤였다. 싸리나무는 나무 속에 습기가 아주 적고 참나무에 막 먹을 만큼 단단하여 비 오는 날에 생나무를 꺾어서 불을 지펴도 잘 타며 화력이 강하 고 연기마저 없으니 최첨단 군수물자이기도 하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 산맥에서도 싸리나무로 불지피는 공비들의 이야기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우 리나라에 자라는 싸리나무는 20여종이나 되는데 모두 자그마하게 자라 는 난쟁이 나무이고가장 흔한 종류는 싸리와 조록싸리이다. 하나의 잎자 루에 3개씩의 잎이 달리는데 작은 잎이 예쁜 타원형이면 싸리, 잎의 끝이 차츰차츰 좁아지는 긴 삼각모양이면 조록싸리이다.

어떤 연유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전국의 수많은 사찰에는 건물의 기둥 을 비롯하여 구시(구유)와 목불(木佛)에 이르기까지 큰 나무유물이 싸리나 무로 만들어졌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승보종찰 송광사, 팔공산의 동 화사 등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구시가 중생들의 눈길을 끈다.

오 늘날 아무리 크게 자라도 사람 키 살짝인 작은 나무이지만 수 백년 수 천년 전에는 혹시 아름드리로 자란 것은 아닌가? 의심 많은 현대인들은 고 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나 식물학적인 상식으로는 전혀 가능하지도 않고 있 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구시를 비롯하여 싸리나무로 알려진 나무는 무슨 나무인가? 이 의문을 풀어보기 위하여 현미경으로 세포모양을 조사해 보았다. 예상대로 싸리나무가 아니라 실제로는 느티나무였다.

느 티나무가 왜 싸리나무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어디까지나 추정이겠으나 느티나무의 재질이 사리함 등 불구(佛具)의 재료로 매우 적합하여 절에서 도 흔히 사용한 것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사리함을 만드는데 쓰였 든 느티나무를 처음에 사리(舍利)나무로 부르다가 발음이 비슷한 싸리나무 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박상진경북대 임산공학과 교수




탱자나무


박 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서 최 참판 댁의 설명을 보면, '사랑 뒤뜰을 둘러친 것은 야트막한 탱자나무 울타리다. 울타리 건너편은 대숲이었고, 대숲을 등지고 있는 기와집에 안팎일을 다 맡는 김 서방 내외가 살고 있었 는데...'라고 생울타리를 그려놓은 구절이 있다.

탱자나무는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예로부터 울타리로 널리 심었다. 충남 서산에는 사적 11호인 해미읍성이 있는데,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깊은 도 랑을 파고 성벽 둘레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일명 탱자성이란 의미로 지성 (枳城)이라고도 하였다. 강화도에 있는 천연기념물 78호와 79호의 탱자나 무 역시 외적의 침입을 저지할 목적으로 심은 것 중의 일부가 지금까지 남 아있다.

자 연상태 그대로 두면 더 크기도 하나, 대개 사람 키보다 살짝 높이로 키운다. 약간 모가 난 초록색 줄기가 길고 튼튼하며 험상궂게 생긴 가시가 쉽게 접근을 거부하는 듯 제법 위엄을 준다. 그러나 늦봄에 피는 새하얀 꽃은 향기가 그만이고, 가을이 되면 동그랗고 노란 탱자열매가 가까이 오 지도 말라고 겁주는 가시에 어울리지 않게 일품이다.

중 국의 고전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제나라 재상 안영이 초나라의 왕을 만나러 갔을 때 안영의 기를 꺾기 위해제나라 의 도둑을 잡아놓고 '당신 나라 사람들은 도둑질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 다'고 비아냥거렸다. 이에 안영은 '귤나무는 회수(淮水)의 남쪽에서 자라 면 귤이 열리지만 회수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열린다고 합니다(橘化爲枳). 저 사람도 초나라에 살았기 때문에 도둑이 됐을 것입니다'고 응수했다.

동의보감과 본초도감에 보면 탱자열매는 피부병, 열매껍질은 기침, 뿌리 껍질은 치질, 줄기껍질은 종기와 풍증을 낫게 한다하여 모두 귀중한 약재 로 쓰였다.

나 무 자체는 별로 쓰임새가 없을 것 같으나 북채를 만드는 나무로는 탱 자나무를 최고로 친다. 소리꾼은 탱자나무 북채로 박(拍)과 박 사이를 치 고 들어가면서 북통을 '따악'하고 칠 때 울려 퍼지는 느낌의 바다에서 희 열을 맛본다고 한다.

중국 원산으로 경기 이남의 따뜻한 지역에 심고 있는 잎이 떨어지는 넓 은잎 가시나무이다. 잎 모양이 독특하여 하나의 잎자루에 3개씩의 작은 잎 이 붙어 있고, 또 잎과 잎 사이의 잎자루에는 좁다란 날개가 달려있다.

쓰임새는 생울타리이며, 제주도 등지에서는 귤나무를 접붙이는 밑나무이 다. 험상궂은 가시와 초록색 줄기 및 잎자루의 날개가 탱자나무를 다른 나 무와 구별해 내는 요점이다.

경북대 임상공학과



6] 산수유


봄 을 알리는 전령은 나뭇가지에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는 새잎과 꽃망울에 서 바로 달려온다. 음력설을 지나고 버들가지에 물이 올라 파르스름하게 변하여 갈즈음, 양지 바른 정원의 산수유는 벌써 샛노란 꽃망울을 터뜨리 기 시작한다. 실제로 이른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은 개나리도 진달래도 아 닌 산수유다.

물론 산수유보다 먼저 꽃피는 매화도 있으나 채 2월에 들어가기 전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하므로 오히려 겨울 꽃에 가깝다.

잎 이 나오기 전에 손톱크기 남짓한 작은 꽃들이 20-30개씩 모여 조그만 우산모양을 만들면서 나뭇가지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집어쓴다. 우리 나라 어디에서나 자랄 수 있으며 수십그루 또는 수백그루가 한데 어울려 꽃동산을 이루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꽃이 지고 주위의 짙푸름에 숨어버린 산수유를 잠시 잊어버릴 즈음 깊어 가는 가을과 함께 갸름한 오이씨처럼 생긴 예쁜 열매가 매달리기 시작한다 . 초록색으로 출발하여 만지면 금세 터져버릴 것 같은 해맑은 선홍색으로 익는다.

산 수유는 꽃과 열매의 모양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한약재로서도 널리 쓰 인다. 동의보감에 '산수유 열매는 정력을 보강하고 성기능을 높이며 뼈를 보호해 주고 허리와 무릎을 덮어준다. 또 오줌이 잦은 것을 낫게 한다'는 내용을 비롯해 산수유가 빠져서는 안될 탕약재의 종류만도 십여가지가 넘 는다.

삼국유사의 제2권 기이(紀異)에 실려있는 신라 48대 경문왕(861-875)에 대한 설화를 보면 당나귀를 가진 임금 이야기가 있다. '경문왕은 임금자리 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나귀의 귀와 같아지니 왕후와 궁인 들은 모두이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복두 만드는 공인(工人)만은 이를 알 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다가 죽을 때에 도 림사의 대나무 숲속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대나무를 향해서 "임금님 귀 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더니, 그 뒤로는 바람이 불 때 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났다.

왕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대나무를 베어 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더니 그 뒤에는 다만 "임금님 귀는 길다"는 소리만이 났다'라는 재미있는 이야 기가 소개되어 있다.

열매가 줄줄이 땅을 향하여 매달려 있는 모양은 유별나게 귓밥이 긴 사 람을 생각나게 하기도 하며, 이때부터 벌써 이 나무를 약재로 쓰기 위해 심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산수유 꽃으로 찾아온 봄의 향취가 익어갈 즈음, 이보다는 조금 늦게 앙 상한 겨울 나뭇가지로 얽혀있는 숲 속에는 꽃 모양이 산수유와 너무나 비 슷한 생강나무가 역시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다.

간단하게 인가 근처에 심고있는 것은 산수유, 숲속에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은 생강나무로 보아도 좋다.

키가 6-7m 자라고 가지가 퍼져 전체적으로 나무는 역삼각형의 모양을 만 든다. 줄기의 껍질이 암갈색으로 비늘처럼 조금씩 벗겨져서 약간 지저분해 보인다.

산 수유는 당초 약용식물로 심어 왔었으나 요즈음은 조경용으로 오히려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잎은 마주나고 끝이 점점 뾰족해 지는 타원형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4-7쌍의 잎맥이 활처럼 휘어져 있고 뒷면 잎맥사이 에는 갈색 털이 촘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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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로쇠나무


왕 건의 고려 건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도선국사(827-898)는 백운산에서 좌선을 오랫동안하고 드디어 도를 깨우쳐 일어나려는 순간 무릎이 펴지지 않았다. 엉겁결에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잡고 다시 일어나려 하였으나 이 번에는 아예 가지가 찢어져 버렸다.

엉 덩방아를 찧은 국사는 방금 찢어진 나뭇가지에서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마침 갈증을 느낀 터라 목을 축이기 시작하였다. 신기 하게도 이 물을 마시고 일어났더니 무릎이 쭉 펴지는 것이 아닌가. 국사는 이 나무의 이름을 뼈에 이롭다는 의미로 골리수(骨利樹)라고 명명했고, 사 람들은 그때부터 나무 이름을 바꾸어 부르기 시작, 나중에 변하여 고로쇠 가 되었다 한다.

3월초 경칩을 전후하여 지리산 줄기인 백운산 자락에는 전국에서 '고로 쇠 물'을 마시러 사람들이 몰려든다.

나 무의 굵기에 따라 다르나 한 나무에서 여러 말(斗)이 나온다.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고로쇠 나무의 가지나 줄기의 꼭지에 있는 겨울눈은 봄기운을 제일 먼저 감지하고 나무의 각 부분이 깊은 겨울잠에서 어서 깨 어나라고 옥신(auxin)이라는 전령을 파견한다. 뿌리까지 내려온 전령은 필 요한 물과 영양분을 흡수하여 잎과 줄기로 보낼 것을 재촉한다. 뿌리의 세 포들은 아직 채 녹지도 않은 땅 속에서 부랴부랴 물과 양분을 빨아들여 열 심히 위로 올려보내는 데, 사람들이 올라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뽑아 낸 것이 고로쇠 물이다.

얼마 전 까지만 하여도 보기 흉하게 나무 줄기에 V자 홈을 파서 수액을 받아냈으나 요즈음은 직경 2-3cm의 구멍을 내어 채취한다. 시기는3월초의 경칩전후 약 1주일 동안의 것이 가장 좋으며 위장병, 신경통, 허약체질 등 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건 강에 좋다면 잠자는 개구리까지 몽땅 먹어치우는 우리네 식성 때문에 고로쇠 나무도 세상에 태어난 후 최대의 시달림을 받고 있다. 고로쇠 물을 빼앗긴 나무는 한창 자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차츰 기력이 떨어져 한 여 름에도 짙푸르기보다 오히려 노르스름한 잎사귀를 내놓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에 산림청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로쇠 수액채취 지침'을 내 놓았다. '수액을 채취하는 구멍은 그루 당 1-2개를 뚫고 7-10일이 지난 후에는 채 취한 구멍을 스티로폼이나 코르크 등으로 막아 균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 허가 없이 고로쇠나무 수액을 채취하면 산림법에 따라 5년 이하의 징역이 나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내린다'고 협박에 가까운 알림판을 붙여보 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고로쇠는 전국에 분포하며,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큰 나무로서 깊은 산 속에서는 아름드리로도 자란다. 가지도 잎도 정확하게 마주난다. 잎은 모 양이 독특한데 물갈퀴가 달린 오리나 개구리의 발처럼 5-7개로 크게 갈라 지고, 개개의 발가락은 삼각형이다.

꽃 은 암수 한나무로 5월에 연한 황록색으로 피우고, 열매는 프로펠러 같 은 날개가 서로 마주보며 달리는 것이 특징이고 단풍나무의 한 종류이다. 목재는 단단하고 질겨서 체육관바닥 마루판으로는 최고급재이며, 운동기구, 피아노의 엑션 부분을 만드는 데도 없어서는 안되는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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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측백나무


측 백(側栢)이란 잎이 옆으로 자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본초강목 에서는 밝히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고 납작한 비늘모양의 잎이 나 란히 포개져 있어서 보통 침엽수와는 다르다. 꼭 옆으로 자란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측백이란 이름이 나무의 잎 모양과 어울린다.

측백나무의 고향은 어디일까. 약간의 논란이 있다. 중국이라는 주장과 우리나라에도 본래부터 자라던 나무라는 주장이 맞선다. 대체로 심지 않았 는데도 자연적으로 자라면 그 지방을 나무의 고향으로 본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측백나무가 거의 절벽에 붙어 자라는 것을 두고 몇 몇 일본인 학 자들은 '위쪽의 묘지에 심어둔 나무의 종자가 떨어져 사람이 갈 수 없는 절벽에 숲을 이루게 되었지만 본래는 중국 원산의 나무이다'고 주장한다.

이런 애매한 논란에는 순수한 학문적인 접근보다는 때로는 약간의 감정 이 끼게 마련이다. 어느 쪽이 맞는 지는 하느님과 혹여 자기의 족보를 잘 외우고 있는 '양반 측백나무'밖에 아는 이가 없다.

중 국의 주나라 때 임금의 능에는 소나무, 왕족의 묘에는 측백나무를 둘 레나무로 심도록 하여 소나무 다음으로 대접받는 나무이기도 하였다. 조선 왕조실록에 실린 영조대왕의 묘지문(1776)에는'장릉(長陵)을 옮겨 모신 뒤 에 효종께서 측백나무의 씨를 옛 능에서 가져다 뿌려 심으셨으니, 또한 임 금의 효성이 끝이 없다'하여 묘소의 둘레나무로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심었 음을 알 수 있다.

또 측백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선비의 절개와 고고한 기상을 나타내는 대 표적인 나무다. 중종 34년(1540) 전주 부윤 이언적이 올린 나라를 다스리 는 방법에 대한 상소문에 '군자는 소나무나 측백나무 같아서 홀로 우뚝 서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지만, 간사한 사람은 등나무나 겨우살이 같아서 다 른 물체에 붙지 않고는 스스로 일어나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이는 이덕유 가 당나라 무종에게 올린 고사를 인용하여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측백나무에 비유하여 간한 것이다.

측백나무는 석회암지대에 회양목과 같이 자라는 경우가 많으며 아름드리 로 크게 자랄 수 있는 늘 푸른 침엽수이나 대부분은 관목처럼 자란다. 나 무 껍질은 길게 세로로 깊게 갈라지고 회갈색이다. 줄기에 혹 같은 이상조 직이 잘 발달하고 줄기도 울퉁불퉁한 경우가 많다. 가지가 옆으로 벌어지 는 일반 나무들과는 달리 거의 수직으로 발달하는 것이 특징이다.

자람이 늦고 나이를 먹으면 줄기가 잘 썩어버려 나무 자체로 쓰임새는 별로 없고 예로부터 향교나 양반집의 정원 및 생울타리 등으로 흔히 심었 다.

대구시 동구 도동 향산의 측백수림은 천연기념물 1호다. 모두가 서울 중 심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문화정책에도 불구, 1호가 지방에 있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곳은 조선초기의 문신 서거정(1420~1488)의 사가집(四佳集)에 실린 대 구십경 중의 하나인 제6경으로서 북벽향림(北壁香林)이란 제목의 시가가 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옛 벽에 푸른 향나무(측백나무) 창같이 늘어섰네 /사시(四時)로 바람 곁에 끊이잖는 저 향기를 /연달아 심고 가꾸어 /온 고 을에 풍기게 하세'라고 번역하였다.

설악산과 오대산 등 높은 산의 꼭대기에는 아예 누워서 자라는 눈측백이 있다. 또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며 향기가 있고 잎이 넓은 서양측백은 미국 에서 들여와 정원수로 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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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목련


한자로 목련(木蓮)이라고 하여 연꽃처럼 아름다운 꽃이 나무에 달린다는 의미다. 찬바람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른 봄, 나뭇가지에 잎이 나오는 것 도 기다리지 못하고 피어버리는 화사한 하얀 꽃이 이 나무의 특징이다.

꽃 크기가 어른 주먹만하고 꽃잎 하나 하나는 하얗다 못해 고고한 학의 날개 깃을 보는 듯하며 향기 또한 은은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 다. 우리 주변에 흔히 심는 목련은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백목련을 두고 하는 말이며 토종 목련은 제주도에만 자란다.

목련의 겨울을 나는 모습도 좀 독특하다. 가지 끝마다 손가락 마디만한 꽃눈이 회갈색의 부드러운 털로 두껍게 덮여 있다. 겨울 동안 혹독한 추위 를 이겨내기에는 안성맞춤의 구조다. 외투는 두툼하여도 봄을 느끼는 춘감 대(春感帶)는 너무나 예민하여 봄기운이 막 찾아오려 할 때쯤 참지 못하고 벌써 꽃을 피워버린다.

꽃이 필 즈음에 꽃봉오리가 모두 북쪽을 향한다 하여 북향화(北向花)라 불리기도 한다. 과연 꽃봉오리가 북쪽을 향하는가? 자세히 관찰해 보면 겨 울 꽃눈의 끝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비율이 반은 넘는 것 같다.

과학적인 명확한 근거가 없어 옳고 그름을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실향 민들이 고향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이 꽃을 보고 북쪽에 두고 온 부모 형제를 생각하는 대상으로 여기다 보니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싶다.

작고 자질구레한 꽃을 잔뜩 피우는 보통 꽃과는 달리 가지의 꼭대기에 1개씩 커다란 꽃을 피우는 고고함이나 순백의 색깔은 이 꽃의 품격을 말하 는 것 같다.

동 의보감에는목련을 신이(辛夷)라 하여 꽃 피기 전의 꽃봉오리를 따내 어 약재로 사용하였다. '얼굴의 죽은 깨를 없애고 코가 막히거나 콧물이 흐르는 것을 낫게 한다. 얼굴의 부기를 내리게 하고 치통을 멎게 하며 눈 을 밝게 한다'고 쓰여져 있다.

삼 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 7년(서기48) 7월27일 아직도 총각인 임 금을 딱하게 여긴 신하들이 장가 들 것을 권하자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 은 하늘의 명령이니 짝을 얻는 것도 하늘의 뜻이 있을 것이다'고 하면서 점잖게 거절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키를 정돈 하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가서 그들을 맞아 들였다. 배 안에는 아리 따운 공주가 타고 있었는데, 이이가 바로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 (許黃玉)으로서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다.

꽃이 아닌 나무로서, 목련의 쓰임새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잎 이 떨어지는 넓은 잎 큰 나무이고 나무 껍질은 연한 잿빛으로 거의 갈 라지지 않는다. 잎은 넓은 달걀모양이고 어린아이 손바닥만큼 크다. 언뜻 보면 감나무 잎처럼 생겼으며 두껍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다. 열매는 손 가락 길이 만하고 주걱모양으로 휘어져 있으며 가을에 벌어지면서 매달리 는 새빨간 씨가 독특하다.

목련과 모양이 거의 비슷하나 꽃이 피는 시기가 약간 늦고 꽃의 색이 보 라빛인 것이 자목련(紫木蓮)이다.

경북대 과.sjpark@knu.co.kr">임산공학과.sjpark@knu.co.kr



9] 생강나무


한 약에는 감초가 들어가야 되는 것처럼 우리의 전통요리에 생강이 빠지 면 제대로 감칠맛이 나지 않는다. 잎을 찢거나 어린 가지를 분지르면 생강 냄새가 나는 나무가 바로 생강나무다. 야외수업으로 산에 가면 나는 학생 들, 특히 여학생들의 코밑에 생강나무 잎을 갖다대고 무슨 냄새가 나느냐 고 짖궂게 물어본다. 한결같은 대답은 풀냄새란다. 입시 준비에 찌들은 요 즘 여학생들이 부엌에 들어갈 짬이 없으니 독특하게 나는 생강냄새를 알 리가 없다.

이 나무는 기껏 자라야 키 5-6m에 팔뚝 굵기가 고작인 아담사이즈다. 그 러나 봄에는 꽃과 새잎, 여름에는 독특한 모양새의 잎으로 이루어지는 녹 음, 가을에는 열매와 단풍이 모두 우리의 관심을 끄는 나무다.

앙 상한 겨울나무의 가지가 아직 일어날 낌새도 보이지 않는 이른 봄, 숲 속 깊숙한 곳에서는 제일 먼저 생강나무가 샛노란 꽃을 피워 겨우 잠에서 깨어날려는 다른 나무들이 아이쿠 늦었구나! 하고 정신이 번쩍 나게 만든 다. 인가 근처에는 산수유, 숲 속에는 생강나무가 다른 어느 나무보다 빨 리 꽃이 핀다. 회갈색의 나뭇가지에 잎도 나기 전에 조그마한 꽃들이 점점 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양은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봄의 전령임을 자랑하 는듯하다. 그래서 품격 높은 매화에도 뒤지지 않는다 하여 황매목(黃梅木) 이란 이름도 얻었다.

꽃이 지고 새싹이 돋아날 때 즈음 이를 조심스럽게 따 모으면 바로 작설 차의 재료가 된다. 차나무가 자라지 않는 추운 지방에서는 차의 대용으로 사랑받아왔으며, 차(茶)문화가 사치스런 서민들은 향긋한 생강냄새가 일 품인 산나물로서 즐겨왔다.

여 름의 시원한 그늘나무로서의 역할을 거치고 나면 꽃을 보고 잊어버린 생강나무는 가을 단풍 때 다시 한번 우리의 눈길을 끈다. 곱게 물든 샛노 란 생강나무 단풍은 푸른 가을하늘과 기막히게 조화를 이룬다. 붉은 잎만 이 아름다운 단풍이 아니라는 것을 생강나무 단풍을 보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잎이 떨어진 가지에는 콩알 굵기의 새까만 열매가 달린다. 처음에 초록 빛이나 노랑빛, 분홍색을 거쳐 가을은 검은 빛으로 익는다. 옛 멋쟁이 여 인들의 삼단같은 머리를 다듬던 머릿기름이 이 열매에서 나온다. 남쪽에서 만 나는 진짜 동백기름은 양반네 귀부인들의 전유물이고 서민의 아낙들은 생강나무 기름을 애용하였다. 그래서 일부 지방에서는 개동백나무 혹은 아 예 동백나무라고도 한다.

창 경궁 경춘전 옆 낙선재 경계 담장 밑에는 생강나무로서는 거목이랄 수 있는 제법 커다란 나무가 자라고 있다. 왕비나 빈의 품계에 오르지 못한 이름없는 궁녀들은 동백기름을 얻어 멋 낼 차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니 아 마 생강나무 기름으로 머리단장하고 꿈처럼 찾아줄 임금님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전국 어디서나 자라는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작은 나무다. 나무 껍질은 갈라지지 않고 흰 반점이 있다. 잎은 어긋나기로 나며 계란모양으 로 위 부분이 3-5개로 갈라지고 아기 손바닥만하다. 가장자리는 밋밋하며 뒷면에 털이 있다. 암수가 딴 나무다.




10] 능수버들


가 지가 아래로 운치 있게 늘어지는 큰 버드나무에는 능수버들과 수양버 들이 있다. 봄에 새가지가 나올 때 적갈색인 것은 수양버들, 황록색인 것 은 능수버들이다. 두 나무는 너무 비슷하여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구분이 어렵다. 어느 쪽인지 정확한 판별은 전문가의 몫이고 우리는 늘어지는 버 들을 수양버들보다는 더 낭만적인 능수버들로 알고 있어도 크게 틀림이 없 을 것 같다.

능수버들은 경기민요 가락에 나오는 흥타령 천안삼거리를 연상하게 만든 다.

'천안삼거리 흥/능수야 버들은 흥/제멋에 겨워서 흥/축 늘어졌구나 흥...' 이 짧은 구절에서 우리는 능수버들의 모양새를 짐작하고도 남으며 어깨를 들먹일 춤판이 금세 벌어질 것 같은 감흥에 사로잡힌다.

천 안시 삼룡동에 있는 '천안삼거리'는 능수버들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 설이 있다. 옛날 한 홀아비가 능소(綾紹)라는 어린 딸과 가난하게 살다가 변방의 군사로 뽑혀 가게 되었다. 그는 천안삼거리에 이르자 어린 딸을 더 이상 데리고 갈 수가 없어서 주막에 딸을 맡겨 놓기로 했다. 그리곤 그는 버드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고 딸에게 이르기를 '이 나무가 잎이 피면 다시 이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 후 어린 딸은 곱게 자라 기생이 되었으며 미모가 뛰어난데다가 행실 이 얌전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마침 과거를 보러 가던 전라도 선비 박현수와 인연을 맺었고 서울로 간 그는 장원급제하여 삼남어사가 되었다. 박 어사는 임지로 내려가다가 이곳에서 능소와 다시 상봉하자 '천안삼거 리 흥, 능소야 버들은 흥'이라노래하고 춤추며 기뻐하였다.

마침 전쟁에 나갔던 아버지도 살아서 돌아와 능소와 다시 만날 수 있었 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곳의 버드나무를 능소버들 또는 능수버들이라 부르 게 되었다 한다.

능 수버들은 벌써 삼국시대부터 임금님도 좋아하던 나무였다. 삼국사기 백제 무왕 35년(634)조에는 '3월, 대궐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사면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방장선산을 흉내낸 섬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오늘날 부여읍 남쪽에 있는 궁남지(宮南池) 를 일컫는다.

조선후기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에 보면 지금의 창경궁 영춘문 앞 도로 건너편과 종묘 쪽 궁내에 여러 그루의 능수버들이 보인다. 경복궁 경회루 옆에는 지금도 능수버들이 자라고 있으며 조선의 궁궐 여 기저기에 많은 능수버들이 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의 활쏘기 명인이라면 윌리엄 텔이고 우리나라의 명궁이라면 태조 이성계를 꼽는다. 그 탓에 조선왕조 때는 임금이 참가한 활쏘기가 흔히 있 었으며, 최고의 명궁은 늘어진 능수버들의 잎을 맞히는 것이다. 말이 그렇 지 엄지손가락 너비만한 능수버들 잎을 활로 맞힌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 고, 많은 버들잎 중에 어느 잎이 맞았는지 찾아내는 방법도 없다. 아마 그 만큼 정확해야 한다는 상징의 의미였을 것이다.

비슷한 나무에는 수양버들 외에 용버들이 있다. 용모양의 버들이란 의미 인데 늘어지기는 마찬가지이나 어린가지는 물론 상당히 굵은가지까지도 용 이 승천하는 그림처럼 꾸불꾸불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11] 개나리


봄 의 아름다움은 노랑 빛에서 시작된다. 정원의 산수유, 산 속의 생강나 무, 길가의 개나리에서 노랑나비, 노랑병아리 등에 이르기까지 노랑 빛의 느낌은 새 생명이 주는 무한한 가능성, 희망 바로 그것이다. 새 생명이 움 트는 봄의 대명사 노란 꽃의 왕좌는 개나리다.

벚꽃으로 떠들썩하게 봄소식을 전하는 오늘날과는 달리 옛 봄의 전령은 개나리가 첫 꽃망울을 터뜨리는 제주도에서 시작하여 남해안을 상륙하고 산따라 길따라 서울을 거쳐 평양, 신의주까지 온 나라를 노랗게 물들여 놓 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개나리꽃은 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앙증맞게 생긴 노란 꽃에 불과하지만 수백 수천 개의 꽃이 무리 지어 필 때 아름다움을 더한다. 정원에 개나리 가 없다면 가지를 꺾어다 양지바른 곳에 그냥 꽂아만 두어도 잘 자라니 봄 이 다 가기 전에 한 포기쯤 꼭 심어보자. 더욱이 개나리의 학명(學名)에 코레아라는 이름이 들어간 자랑스런 우리의 토종 꽃나무이다.

말나리, 하늘나리, 솔나리, 참나리 등 아름다운 우리나라 꽃에 '나리'란 이름이 들어간 종류가 많다. 이들은 개나리와 꽃 모양새가 아주 닮아 있다.

꽃 이 져 버린 개나리는 쓰임새가 없는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가을에 달리는 볼품 없는 열매가 귀중한 한약재임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개나리의 열매는 연교(連翹)라고 하는데 종기의 고름을 빼고 통증을 멎게 하거나 살충 및 이뇨작용을 하는 내복약으로 쓴다고 알려져 있다.

기록으로 보면 세종5년(1423) 일본사신이 연교 2근을 올린 적이 있고, 선조 33년(1599)에는 임금이 앓자 홍진이란 의사는 청심환에다가 연교를 넣어 다섯 번 복용하시도록 처방하였으며 정조 18년(1793)에는 내의원에서 연교를 넣은 음료를 올렸다는 내용이 있다.

오늘날 잘 쳐다보지도 않는 개나리 열매는 한때 임금님의 건강을 지키는 약재로 쓰였으니 제법 대접을 받은 시절도 있었나 보다.

전 국 어디에나 자라고 잎이 떨어지는 작은 나무이다. 크게 자라도 사람 키를 조금 넘을 정도가 고작이고 땅에서 많은 줄기가 올라와 한 포기를 이 룬다. 울타리로 심으면 아래로 늘어지는 가지가 꽃이 진 다음에도 멋스런 운치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어린 가지는 초록빛이나 차츰 회갈색으로 된 다. 자세히 보면 작은 점 같은 숨구멍이 뚜렷하게 보인다. 잎은 마주나기 하며 긴 타원형으로 윗부분에 톱니가 있거나 때로는 밋밋하다.

꽃은 이른 봄 잎이 나오기 전에 잎겨드랑이에 1-3개씩 핀다. 열매는 달 걀모양이며 편평하고 가을에 갈색으로 익으며 날개가 있다.

개 나리와 비슷한 나무로, 세계적으로 한 종류 밖에 없으며 우리나라의 충북, 전북의 일부 지역에만 자라는 미선나무가 있다. 열매가 마치 부채를 펴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모양이므로 미선(美扇)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른 봄 개나리처럼 잎보다 먼저 피고 흰빛 또는 분홍색으로 피며 은은한 향 기가 있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 sjpark@knu.co.kr



12] 진달래


산 넘어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따스한 봄바람을 완연히 느낄 즈음 동네의 앞산은 물론 높은 산의 꼭대기에도 온통 진달래꽃으로 뒤덮인다. 붉은 빛 깔이 조금 더 강한 분홍색의 꽃은 잎보다 먼저 가지마다 무리지어 피우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예로부터 사랑을 노래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손님이 다.

"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로 이어지는 소 월의 시속에서의 정경처럼 진달래꽃은 너무나 정겨운 우리 강산의 우리 꽃 이다. 북한의 영변 약산은 소월이 아름다운 시상을 얻던 낭만적인 곳이 아 니라 무시무시한 핵 시설로 우리에게 더 다가오는 것이 안타깝다.

진 달래는 한때 북한의 국화로 알려져 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은 꽃빛과 함 께 금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김일성이 좋아했으며 과거 항일 빨치산 활동을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목련과 사촌쯤 되고 자 기들 이름으로는 목란(木蘭), 우리 이름으로는 함박꽃나무가 북한의 국화 임이 최근에 와서야 알려졌다.

남부지방에서는 진달래란 이름보다 참꽃이 더 친숙하다. 가난하던 시절 에는 진달래가 필 즈음이 가장 배고픈 시기다. 주린 아이들은 진달래 꽃잎 을 따먹고 허기를 달래서 진짜 꽃이란 의미로 참꽃이란 이름을 자연스럽게 붙였다.

식 물도감을 찾으면 제주도에 참꽃나무가 있다고 적혀있기도 하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참꽃'은 진달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린시절 진달래 꽃잎 은 따먹어도 비슷한 철쭉은 연달래라 하여 먹으면 죽는다고 '선배 어린이' 들로부터 단단히 교육을 받았다. 철쭉꽃에독이 있다는 것을 용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자 이름은 두견화(杜鵑花)다. 중국의 촉나라 망제(望帝)는 죽음의 직 전에 이른 벌령이란 사람을 살려서 정승으로 중용하였다가 아예 나라를 빼 앗기고 국외로 추방되는 비운을 당한다.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죽 어서 두견새가 되어 밤마다 촉나라를 날아 다니며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 그 피가 진달래 가지위에 떨어져 핀 꽃이 바로 두견화, 우리의 진 달래꽃이란 것이다.

음 력 3월3일의 삼짇날에는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라 하여 봄을 맞는 마음 으로 꽃전(花煎)을 붙여먹는 풍습이 있다. 화전이란 찹쌀가루에 꽃잎을 얹 어서 지진 부침개를 말하는데, 이 풍속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며 조선시대 는 비원에서 삼짇날 중전이 궁녀들과 함께 진달래꽃 화전을 부쳐먹는 행사 를 치르기도 하였다.

청주에 선 진달래꽃을 넣어 술을 빚고 두견주라고 한다.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이 병에 걸려 휴양할 때 17세 된 딸이 꿈에 신선의 가르침을 받아 만든 술이라고 하며 진통, 해열, 류머티즘의 치료약으로 쓰였다. 진달래 꽃잎에 녹말가루를 씌워 오미자 즙에 띄운 진달래 화채 역시 삼월삼짇날의 절식(節食)이다.

전국 어디에서나 사람 키보다 조금 클 정도로 자란다. 손목 굵기 정도면 꽤 오래된 나무에 속하고 껍질은 매끄러운 회백색이다.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형이며, 양끝이 좁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벌어진 깔때기형이고 가장자리가 5개로 갈라진다. 드물게 백색 꽃이 피는 것을 흰진달래라 하여 아주 귀하게 여긴다.



13] 느릅나무


원 효대사가 요석공주를 얻기 위하여 일부러 남천으로 뛰어 들어 빠졌던 그 다리의 이름이 유교(楡橋)이다. 곧 느릅나무 다리란 뜻이다. 몇년전 경 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바로 그 다리로 짐작되는 나무다리를 남천가에서 발굴 했다. 재질을 알아보았더니 실망스럽게도 참나무였다고 한다. 아마 다리 옆에 느릅나무가 있어서 유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느 릅나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목재로서의 쓰임새도 많지만 나무껍질은 한약재로 유명하다. 뿌리의 껍질은 유근피(楡根皮)라 하여 동의보감에는 '대소변을 잘 통하게 하고, 위장의 열을 없애며, 부은 것을 가라앉히고, 불면증을 낫게 한다'고 한다. 나무껍질은 유백피(楡白皮)라 하여 역시 약 재로 쓰일 뿐만 아니라 소나무의 속껍질처럼 예부터 흉년때 허기를 달래는 데도 요긴하게 쓰였다.

삼 국사기 온달 장군 이야기에는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내용 이 있다. 평강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 자 온달의 집까지 찾아가서 시집을 가겠다고 청하였다. 눈먼 온달의 노모 가 이르기를,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어서 귀인이 가까이 할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지 오래입니 다" 라고 거절했다.

마 침 산에서 내려오는 온달과 마주쳤다. 그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 니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필시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며 돌아보지 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끈질기게도 온달의 초가집 사립문 밖에서 노숙 하면서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 드디어 허락을 받았다.

혹시 온달을 부러워하는 이가 있다면 꿈을 깨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공 주라는 신분에다 글 모르는 신랑을 교육시켜 장군으로 출세까지 시켰으니 온달 입장에서야 평생 평강 공주에게 큰 소리 한번 낼 수 있었겠는가.

전 국 어디에나 자라고 잎의 밑 부분이 좌우 대칭이 안되고 어긋나 있는 것이 느릅나무 종류의 특징이다. 여러 느릅나무가 있으나 주변에서 흔히 보는 종류는 느릅나무와 참느릅나무다. 나무 껍질이 오래되면 흑갈색으로 세로로 깊이 갈라지며 잎이 크고 겹 톱니가 있는 것이 느릅나무, 나무 껍 질이 오래되면 회갈색으로 두꺼운 비늘처럼 떨어져 나오며 잎이 메추리 알 크기 만하고 단순 톱니가 있는 것이 참느릅나무다.

열매는 크기가 손톱 만하고 종이처럼 얇은 데 한 가운데 납작한 종자가 들어 있어서 바람에 날아가기 쉽게 되어 있다. 모양이 동전과 비슷하여 옛 날에는 동전을 유전(楡錢) 혹은 유협전(楡莢錢)이라고도 하였다.

박목월의 '청노루' 시에도 나오는 우리에게 낯익은 나무다.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 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굽이를 /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

느릅나무에 봄이 찾아오는 모습이 눈앞에 잡힐 듯하다.

경북대 과.sjpark@knu.ac.kr">임산공학과.sjpark@knu.ac.kr



14] 벚나무


벚 나무는 커다란 나무에 잎도 나오기 전, 화사한 꽃이 구름처럼 나무를 완전히 덮어 버리는 아름다운 나무이다. 꽃봉오리가 열리기 시작하여 일주 일 정도면 한꺼번에 피었다가 져버리는 꽃이다. 동백이나 무궁화처럼 통째 로 꽃이 떨어져 나무 밑에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라 벚꽃은 5개의 작은 꽃 잎이 한 장씩 떨어져 산들바람에도 멀리 날아간다. 그래서 벚꽃이 떨어지 는 모양은 산화(散花)란 말이 어울리고 비슷한 어감의 산화(散華)는 꽃다 운 나이에 전쟁에서 죽은 젊은이와 비유한다.

벚나무는 천년을 거뜬히 넘기는 은행나무나 느티나무와는 달리 백수(白 壽)를 채 넘기지 못하는 인간의 수명과 비슷하다. 꽃이 한꺼번에 피느라 정력을 너무 소모해 버렸고 유달리 갑각류 곤충의 피해를 받기 쉬운 탓이 란다.

우 리에게 다가오는 벚꽃의 느낌은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불행히 도 이 아름다운 꽃이 일본을 대표하는 꽃으로서 일제 강점기에는 그들이 사는 곳은 벚나무로 치장하였으며, 더욱이 우리의 전통 궁궐인 창경궁에 동물원을 조성하고, 그도 모자라 벚나무를 줄줄이 심고 시민의 휴식처란 이름으로 꽃구경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벚나무로 상징되는 치욕 의 역사를 우리는 쉽게 지울 수 없다.

벚꽃이 피는 나무는 벚나무, 왕벚나무, 산벚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섬벚나무, 꽃벚나무, 능수벚나무 등 그 종류가 많다. 이들의 차이점은 암 술대와 꽃자루에 털이 있느냐, 꽃잎 길이의 길고 짧음 등이 고작이어서 오 랫동안 식물분류학을 공부한 전문가만이 구별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가 벚나무 심기의 최대 명분으로 삼는 제주도 자생의 왕벚나 무나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에 심는 벚나무나 보는 사람은 그냥 '벚나무'일 따름이다.

옛 문헌에 보면 벚나무와 자작나무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다 같이 화 (樺)자를 쓸 만큼 꽃에는 관심이 없었다. 꽃보다는 껍질의 이용이 더 중요 하였다.

벚 나무 껍질은 화피(樺皮)라는 이름으로 활을 만드는데 필수품으로 들어 가는 군수물자이었다. 세종실록의 오례에 관한 내용 중에 '붉은 칠을 한 활은 동궁이라 하고, 검은 칠을 한 것은 노궁이라 하는데 화피를 바른다' 하였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화피 89장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병자호란을 겪고 중국에 볼모로 잡혀간 효종은 그 때를 설욕하려고 대대적 인 북벌 계획을 세우고 활을 만들 준비로 서울 우이동에 많은 벚나무를 심 게 하였다.

벚 나무는 꽃과 껍질의 쓰임새로 끝나지 않는다.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옛 목판(木板)인쇄의 재료로서 배나무와 함께 가장 사랑 받는 나무였다. 팔만대장경판에 쓰인 나무의 60% 이상이 산벚나무로 만들어 졌음이 최근 현미경을 이용한 과학적인 조사에서 처음으로 밝혀졌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껍질이 세로로 갈라지는 것과는 달리 벚나무 종류들 은 가로로 짧은 선처럼 갈라지기 때문에 멀리서도 쉽게 찾아 낼 수 있다.

그래서 몽골군에 유린당한 육지에서 몰래 한 나무씩 베어 가까운 강을 타고 경판(經板) 만드는 곳으로 운반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15] 살구나무


옛날 중국 오나라의 동봉(董奉)이란 의사는 환자를 치료해 주고 치료비 를 받는 대신 의원앞 뜰에다 중환자는 다섯 그루, 병이 가벼운 환자는 한 그루의 살구나무를 심게 하였다.

얼 마되지 않아 동봉은 수십만 그루의 살구나무 숲을 갖게 되었고 사람들 은 이 숲을 동선행림(董仙杏林) 혹은 그냥 행림이라고 불렀다한다. 그는 여기서 나오는 살구열매를 곡식과 교환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도 하 였다. 그래서 행림이라면 진정한 의술을 펴는 의원을 나타낸다.

왜 많은 과일나무 중에 하필이면 살구나무인가? 한방에서는 살구씨를 행 인(杏仁)이라 하여 만병통치약처럼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서 살구 다섯 알을 따내 씨를 발라 동쪽에서 흐르는 물을 길어 담가 두었다가, 이른 새벽에 이를 잘 씹어 먹으면 오장의 잡물을 씻어내고 육부 의 풍을 모두 몰아내며 눈을 밝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본초강목 에도 200여 가지의 살구씨를 이용한 치료방법이 알려져 있어서 약방의 감초가 아니라 '약방의 살구'역할을 한 것이다. 그래서 살구열매가 많이 달리는 해에는 병충해가 없어 풍년이 든다고도 하며 살구나무가 많은 마을에는 염병이 못 들어온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흔히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병원 앞에 살구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말한 다. '우선 살구 보자'라는 뜻이라니 옛 사람들의 행림이나 오늘날의 살구 는 무병장수의 진정한 바람을 다같이 살구나무와 병원과의 관계에서 찾았 는지도 모른다.

살구나무는 중국에서도 재배역사가 오래된 과일나무이며 우리나라에 들 어온 것도 삼국시대 훨씬이전일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복숭아, 자두와 함께 우리의 대표적인 옛 과일로서 역사기록에 흔히 등장한다.

살구꽃이 피는 시기를 보아 이상 기후인지 정상인지를 판단하였고 조선 태종 때의 기록을 보면 철따라 종묘의 제사에 올리는 제물로서 앵두와 함 께 살구는 빠뜨릴 수 없는 과일이었다.

꽃과 과일로서만의 살구나무가 아니다. 깊은 산 속 고즈넉한 산사에서 학덕 높은 스님이 두들기는 목탁의 맑고 은은한 소리는 어디서 얻어질까? 몇가지 나무가 알려져 있지만 최고로 치는 목탁은 살구나무 고목에서 얻는 다고 한다.

일 제의 강제병탄 이후 처음 들어선 1920년대의 고무공장에는 처녀들이 발목이 약간 들어 날 정도의 짧은(?) 치마를 입고 다녔다 한다. 이를 두고 당시에 '공장 큰아기 발목은 살구나무로 깎았나 보다/ 보기만 하여도 신침 이 도네!.../ 보기만 하여도 알딸딸하네!'라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살구나무의 속살은 맑고 깨끗한 흰색이 특징으로 살짝 내보인 발목이 그렇 게 섹스어필하였던 모양이다. 그 때 그 어른들이 환생하여 오늘의 거리를 보신다면 아마 기절하여 다시 돌아가실 것이다.

시 골 집안이나 마을 주변에 흔히 심는다.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나무로 그렇게 크게 자라지는 않는다. 잎은 달걀모양이며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톱 니가 있다. 꽃은 봄이 무르익어 갈 무렵 잎보다 먼저 연분홍색으로 피며 꽃자루가 거의 없다. 열매는 지름 3cm 정도로 둥글며 털이 있고 초여름에 붉은 빛이 도는 노랑 색으로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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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복숭아나무


중 국 진(陳)나라 효무제(376-396) 때, 무릉(武陵)에 살던 어부가 계곡을 따라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 숲 속의 어느 동굴을 지나 복사꽃이 만발하 게 피어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한 마을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논밭이 넓 고 먹거리가 풍족하며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남녀노소가 모두 행복하게 살 고 있었다. 어부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며칠 지낸 뒤에 집으로 돌아온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실려있는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세종29년(1447년)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본 복숭아 숲의 경치를 화가 안견에게 이야기하여 3일만에 그림을 완성한 몽유도원도(夢遊 桃源圖) 역시 이상향의 모델을 복숭아 숲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하 늘나라에는 신선이 먹는 천도(天桃)가 있었다. 전설적인 신선 서왕모 (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먹은 동방삭은 삼천갑자년, 즉 18만년을 살았다 한다. 또 서유기에는 손오공이 먹기만 하면 불로장생할 수 있는 천도 밭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있다가 어느 날 9천년에 한 번 열리는 열매를 몽땅 따 먹어 버렸다. 그는 이 사건으로 나중에 삼장법사가 구해 줄 때까지 500년 동안 바위 틈에 갇히는 호된 시련을 겪게 된다.

이처럼 수많은 과일 중에 복숭아는 신선이 즐겨먹는 과일로 묘사되고 복 숭아 숲은 신선사상과 이어져 유토피아의 대명사가 되었다. 신라시대에 만 들어진 술잔, 고려 때의 청자연적 및 주전자, 조선시대의 백자연적 등에는 복숭아나무의 꽃, 잎, 열매가 그려져 있는 것이 많다.

고 려 인종 원년(1123년) 송나라의 서긍이 사신으로왔다가 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의 귀족들은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하였으며 피 부를 희게 하려고 복숭아꽃 물이나 난초 삶은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민속 으로는 특히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가 잡스러운 귀신들을 쫓아내 는 구실을 한다고 믿고 있었다. 무당이 살풀이할 때는 복숭아 나뭇가지로 활을 만들어 화살에 메밀떡을 꽂아 밖으로 쏘면서 주문을 외기도 한다.

세종 2년(1420년) 어머니인 원경왕후가 위독해지자 '임금이 직접 복숭아 가지를 잡고 지성으로 종일토록 기도하였으나 별 효험이 없었다'하며, 연 산 12년(1505년)에는 '해마다 봄.가을의 역질 귀신을 쫓을 때에는 복숭아 나무로 만든 칼과 판자를 쓰게 하라'하여 왕실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복 숭아나무는 귀신을 물리치는 나무였다. 그래서 제사를 모셔야 하는 사당이 나 집 안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으며 제상의 과일에도 절대로 복숭아를 쓰지 않는다.

동 의보감에 보면 복사나무는 그야말로 버릴 것 하나없는 약재이다. 복사 나무 잎, 꽃, 열매, 복숭아씨(桃仁), 말린 복숭아, 나무속껍질, 나무진을 비롯하여 심지어 복숭아 털, 복숭아 벌레까지 모두 약으로 쓰였다. 으스름 달밤에 복숭아를 먹는 것은 약이 되는 복숭아 벌레를 가장 쉽게 먹는 방법 이다. 아무리 약이라지만 혹시 반 토막난 벌레를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가졌다면 먹기가 정말 끔찍하였을지 모른다.

꽃을 보기 위하여 개량한 복숭아나무에는 꽃잎이 여러 겹으로 된 만첩홍 도가 가장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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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자작나무


' 닥터 지바고'나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옛 영화를 보면 광활하게 펼쳐진 설원(雪原)에 간간이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의연히 맞서서 쭉쭉 뻗은 늘씬한 몸매와 하얀 피부를 한껏 자랑하는 나무 미인들의 군상이 바로 자작나무이다. 그녀는 남남북녀라는 말에 걸맞게 얼 음이 꽁꽁 어는 추운 지방에만 자란다. 자작나무 껍질은 하늘을 날던 천사 가 차디찬 겨울 산 속에 처절하게 서 있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흰 날개로 나무의 등걸을 칭칭 둘러 싼 것 같다.

흰 껍질은 얇은 종이를 여러 겹 붙여 놓은 것처럼 차곡차곡 붙어 있으며 한장 한장이 매끄럽고 잘 벗겨지므로 종이를 대신하여 불경을 새기거나 그 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또 여기에는 큐틴(Cutin)이란 일종의 방부제가 다 른 나무보다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물이 스며들지 않고 부패나 좀이 먹고 곰팡이가 스는 것을 방지한다. 그래서 아무리 나쁜 조건, 심지어 몇천년을 땅속에 묻혀 있어도 거뜬히 버틴다.

러시아는 자작나무 껍질에서 기름을 짜 가죽가공에 쓰는데, 이 가죽으로 책표지를 만들면 곰팡이와 좀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1973 년에 발굴된 천마총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다 하늘을 나는 천마(天 馬)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인 21년 금관총에서 출 토된 금관은 관 안쪽에 자작나무 껍질과 섬유를 대어 머리에 쓰도록 만들 어져 있었다.

또 자작나무 껍질에는 초를 만드는 왁스 성분도 있어 잘 썩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을 붙이면 잘 붙고오래가므로 촛불이나 호롱불 대신에 불을 밝 히는 재료로도 애용되었다.

결혼을 화혼(華婚)이나 화촉(華燭)을 밝힌다고 하는 것도 자작나무 껍질 의 불타는 성질과 관련이 있다. 자작나무란 이름도 껍질이 탈 때 '자작자 작' 소리가 난다는 데서 따온 의성어이다.

나무는 껍질만큼이나 나무속도 거의 황백색으로 깨끗하고 균일하며 옹이 하나 없어 추운 지방의 서민들은 이 나무를 쪼개어 너와집의 지붕을 이었 으며 죽으면 껍질로 싸서 매장하였다.

자 작나무의 또 하나 큰 쓰임새는 수액(樹液)을 뽑아서 마시는 것이다. 곡우때 쯤 줄기에 구멍을 뚫고 엄지손가락 굵기 만한 파이프를 꽂아 물을 받아 마시면 위장병을 비롯한 잔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다 고 알려져 있다.

생 명수를 인간에게 뺏기고도 의연히 서 있는 자작나무를 보고 있으면 흰 껍질 때문에 다가오는 처량함과 아울러 생명의 경외마저 느끼기도 한다. 자작나무가 없는 남부 산간지방에서는 거제수나무, 일명 거자수에서 수액 을 채취하여 '곡우물'이란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시고 있다.

자작나무와 거제수나무는 나무 껍질이 매우 비슷하여 혼동하기 쉽다. 우 선 남한에서는 자연적으로 자라는 자작나무는 없고 대부분 거제수나무이다. 잎 모양으로 보아서 자작나무는 거의 삼각형이며 잎맥이 6-8쌍인데 비하 여 거제수나무는 타원형이고 잎맥의 수가 10-16쌍이므로 주의 깊게 관찰하 면 구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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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돌배나무


"배꽃에 달빛 내려 비추고 은하수 흘러가는 깊은 밤/한가닥 나뭇가지에 걸린 춘심(春心)을 두견새가 어이 알랴마는/다정도 병이련가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 말의 문신 이조년의 다정가(多情歌)이다.

흐드러지게 피는 새하얀 배꽃 위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걸려있는 모습 을 보면 누구라도 시 한 수 읊조리고 싶어진다. 여기에 배꽃 필 무렵 쌀로 빚는다는 이화주(梨花酒) 한잔을 곁들인다면 그야말로 '주상첨화(酒上添 花)'이다.

배나무는 꽃으로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복숭 아, 자두와 함께 대표적인 옛 과일로서 제사상의 맨 앞 과일 줄 조율시이 (棗栗枾梨)에 들어갈 만큼 먼 옛날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만 해 한용운이 1920년대에 쓴 '해인사 순례기'를 보면 환경(幻鏡)이란 스님은 가을에 돌배를 따두었다가 즙을 내어서 그릇에 넣고 밀폐하여 공기 를 통하지 못하게 하여 두었다가 차로 만들어 먹었다 한다. 이 차는 돌배 에서 이름을 딴 석차(石茶)라고 하며 수년을 두어도 그 맛이 조금도 변치 않는다니 한번쯤 만들어 먹어 볼만하다.

배 나무의 목재는 은은한 황갈색에 재질이 골라 옛부터 여러 용도로 쓰였 다. 대표적인 것이 벚나무와 함께 목판(木板)의 재료이다. 해인사 팔만대 장경판은 산벚나무 다음으로 돌배나무가 많이 쓰였으며 조선시대의 양반가 에 보관되어 오고 있는 문집의 목판도 배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배나 무 세포는 배열이 고르고 물관의 크기가 적당하며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 아 글자를새기기에 알맞은 것.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 양원왕 2년(546) '봄 2월, 서울에 가지가 서로 맞붙은 배나무 연리(連理)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연리란 나무와 나무 를 맞붙여 묶어두면 껍질이 파괴되고 서로의 부름켜가 연결되어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이다. 연리목이 알려지면 나라에서는 상서로운 조짐으로 받아들 였고 백성들은 이 나무에다 빌면 금실이 좋아지는 것으로 알았다.

태조 이성계는 배나무와 인연이 많다. 왕업을 일으킬 꿈을 꾸고 토굴 속 에 있는 신승(神僧) 무학에게 그 뜻을 풀어보게 하였고, 즉위한 뒤에는 토 굴이 있던 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석왕사라 하였으며 배나무를 손수 심 었다.

전 북 마이산의 은수사에 있는 천연기념물 386호 청실배나무는 태조가 명 산인 마이산을 찾아와 기도를 마친 뒤 그 증표로 씨앗을 심은 것이 싹이 터 자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 태조실록 총서에는 '백 보(步) 밖에 서로 포개어 달려있는 수 십 개의 배를 한 번에 쏘아서 손님을 접대하였다' 하여 활 솜씨 자랑에도 능수버들과 함께 배나무를 이용하였다.

그 냥 우리가 배나무라는 것은 돌배나무, 산돌배나무, 참배, 백운배나무, 문배나무, 청실배나무 등 엇비슷한 배나무 종류를 통털어서 부르는 이름 이다. 우리나라에는 금화배, 함흥배, 봉산배 등이 옛부터 토종 배로서 널 리 알려졌으나, 일제 침략과 함께 들어온 개량품종들에 밀려 현재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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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느티나무


시골 동네 어귀에는 어김없이 정자나무 한 그루가 초가 지붕과 어우러져 서정적인 우리 농촌 마을의 마스코트 역할을 한다. 이같은 정자나무는 대 부분 느티나무이다.

느 티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천년을 손쉽게 훌쩍 넘기는 장수목이다. 짧 게는 조선왕조, 길게는 고려나 신라인과 삶을 같이 해오면서 민족의 비극 도, 애달픈 백성들의 사연도 모두 듣고 보아오면서 오늘도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는 나무가 바로 느티나무이다.

그 래서 전설을 간직한 느티나무는 수없이 많다. 전북도 임실군 오수면에 는 술에 취하여 잔디밭에 잠자는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견(義犬)을 기리 는 '개나무'란 이름의 큰 느티나무가 자란다.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의 현고수(懸鼓樹)나무는 임진왜란때 의병대장 곽재우 장군이 이 나무에 북을 매달아 놓고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유서 깊은 나무이다.

느 티나무의 목재는 나무 결이 곱고 황갈색의 색깔에 약간 윤이 나며 썩 거나 벌레가 먹는 일이 적은데다 다듬기도 좋다. 그러면서도 물관의 배열 이 독특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갖고 있으며 큰 나무가 될수록 비늘모양, 구 슬모양, 모란꽃 모양의 무늬와 함께 기름 끼가 약간 배어있는 듯한 광택도 있다. 건조를 할 때 갈라지거나 비틀림이 적고 마찰이나 충격에 강하며 단 단하기까지 하다.

느 티나무가 갖는 바깥모양의 고고함을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나무의 여러 가지 속 성질만을 종합해 보아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나무라고 단정할 수 있다. 한마디로 나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장점을 다 가지고 있 는 '나무의 황제'이다.

나 무 다루는 기술이 남달랐던 우리의 선조들이 느티나무를 그대로 썩혀 둘 리가 없다. 경산 임당의 원삼국시대 고분과 부산 복현동 가야고분 및 천마총 관재, 완도 어두리에서 인양된 고려초 화물운반선의 배 밑바닥 판 자 등을 모두 느티나무로 만들었다.

건 축재로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전, 조선시대 사찰건물인 강진 무위사, 부여의 무량사, 구례 화엄사의 기둥은 전부 혹은 일부가 느티나무이다. 또 흔히 스님들이 '싸리나무'로 만들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구시(행사때 쓰는 큰 나무 밥통), 기둥, 나무 불상도 사실은 대부분 느티나무이다.

기타 사방탁자, 뒤주, 장롱, 궤짝 등의 조선시대 가구까지 느티나무의 사용범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정 자나무로서 느티나무만 상상하여 키가 그리 크지 않고 둥그스럼하게 퍼지는 나무로만 알면 큰 잘못이다. 숲 속에서 다른 나무와 경쟁하여 자라 는 느티나무는 곧바르고 우람하게 자란다. 그것도 적당히 자라다 그만 두 는 것이 아니라 키가 20-30m, 지름 너덧 아름은 보통이므로 임금님의 관재 로도, 사찰의 기둥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이다.

산 림청은 새 천년을 맞아 밀레니엄나무로 느티나무를 선정하였다. 느티 나무는 역사성과 문화성을 지니고 있으며, 새 천년동안 강한 생명력을 유 지할 수 있는 장수(長壽) 나무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름만의 새 천년 나무 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는 느티나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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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조팝나무


조 선후기의 고전소설 토끼전에서는 별주부가 육지에 올라와서 경치를 처 음 둘러보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에, '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고 하직하고, 강남서 나오는 제비는 왔노라고 현신(現身)하고, 조팝나무에 비쭉새 울 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오...'하는 내용이 나온다.

4월말이나 5월초의 산기슭에는 지금도 조팝나무 꽃이 어디서나 흔하게 피어있으니 별주부가 토끼를 꾀어내던 그 시절에는 더더욱 흔한 꽃나무이 었을 것이다. 자라의 작은 눈에도 육지에 올라오자 금세 눈에 뜨인 나무가 바로 조팝나무였던 모양이다.

왜 조팝나무인가? 한창 꽃이 피어 있을 때는 좁쌀로 지은 조밥을 흩뜨러 놓은 것 같다 하여 '조밥나무'로 불리다가 조팝나무로 된 것이다.

늦 은 봄 잎이 피기 조금 전이나 잎과 거의 같이 굵은 콩알만한 크기의 새하얀 꽃들이 마치 흰 눈 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수백 수천 개가 무리 지어 핀다. 하나 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작은 꽃이 아니련만 무리를 이루므 로 좁쌀 밥알에 비유될 만큼 꽃이 작아 보인다. 흰빛이 너무 눈부셔 언뜻 보면 때늦게 남아있는 잔설(殘雪)을 보는 듯도 하다.

그 러나 조팝나무의 쓰임새는 꽃을 감상하는 것보다 약용식물로 이름을 날린다. 조팝나무에는 조팝나무산(酸)이라는 해열과 진통제 성분이 포함되 어 있으며, 버드나무의 아세틸살리실산(acetyl salicylic acid)과 함께 진 통제의 원료가 되기도 한다. 진통제의 대명사 아스피린(aspirin)이란 이름 은 아세틸살리실산의 'a'와 조팝나무의속명(屬名) spiraea에서 'spir'를 땄고 나머지는 당시 바이엘사가 자기회사 제품명 끝에 공통적으로 썼 던 'in'을 붙여서 만들었다.

예 부터 조팝나무의 뿌리를 상산(常山) 혹은 촉칠근(蜀漆根)이라 하였는 데, 동의보감에는 '맛은 쓰며 맵고 독이 있다. 여러 가지 학질을 낫게 하 고 가래침을 토하게 하며 열이 오르내리는 것을 낫게 한다'하였다. 또 조 팝나무의 새싹은 촉칠(蜀漆)이라 하여 여러 증상의 학질을 고치는 데 쓰였 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종 5년(1423) 일본사신이 와서 상산 5근과 3근을 두 번에 걸쳐 바쳤다는 기록이 있어서 궁중에서도 쓰이는 귀중한 한약재였음 을 짐작할 수 있다.

전 국 어디에나 자라며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작은 나무이다. 조팝나무 는 사람 키 남짓한 높이로, 손가락 굵기만한 가느다란 줄기가 여럿 모여 집단으로 자란다. 어린 가지는 갈색으로 털이 있으며 잎은 어긋나기로 달 리고 유선형으로 양끝이 뾰족하다. 잎 길이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이며 가 장자리에 잔톱니가 있다. 꽃은 짧은 가지에서 나온 우산모양의 꽃차례에 4-6개씩 달리며 열매는 골돌이라 불린다.

조팝나무 무리에는 이외에도 꽃 모양과 빛깔이 다른 수십 종이 있다. 진 한 분홍빛인 꽃이 꼬리처럼 모여 달리는 꼬리조팝나무를 비롯하여 작은 쟁 반에 흰쌀밥을 소복히 담아 놓은 것 같은 산조팝나무 등이 아름다운 꽃으 로 우리의 산하를 수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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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등나무


등 나무는 주위의 다른 나무들과 피나는 경쟁을 통해 삶의 공간을 확보하 는 것이 아니라, 손쉽게 다른 나무의 등걸을 감거나 타고 올라가 어렵게 확보해 놓은 광합성의 공간을 혼자 점령해 버리는 폭군이다. 칡도 마찬가 지로 선의의 경쟁에 길들여 있는 숲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래서 사람사이의 다툼을 갈등(葛藤)으로 비교하기도 한다.

옛 조선조의 선비들은 등나무의 이와 같은 특성을 대단히 못마땅해 하였 다. 중종 32년(1537) 홍문관 김광진 등이 올린 상소문에 "대체로 소인들은 등나무 덩굴과 같아서 반드시 다른 물건에 의지해야만 일어설 수 있는 것 입니다"라 하여 가장 멸시하던 소인배와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갈등을 빚는 나무이든, 소인배의 나무이든 관념적인 비유일 뿐이 고 등나무만큼 쓰임새가 많은 나무도 드물다.

잎 은 아카시나무와 아주 닮았으나 더 뾰족하고 작으며, 한 여름의 뙤약 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준다. 5월이 되면 연한 보랏빛의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꽃나무로서도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보드라운 털로 덮인 콩 꼬투리 모양의 열매는 너무 짙푸른 등나무 잎사귀의 느낌을 부드 럽게 해주는 액센트이다.

알맞게 자란 등나무 줄기는 지팡이 재료로 적합한데, 영조 41년(1764) 임금이 나이가 들어 걷기가 불편하자 신하들이 만년등(萬年藤) 지팡이를 바쳤다 한다. 덩굴은 바구니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쓰이며 껍질은 매우 억 세고 질겨 새끼를 꼬는데, 또는 키를 만드는 데도 필요한 나무이다.

등나무 이야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등가구에 쓰이는 '등나무'이다. 이 등나무는 외떡잎 식물이며 attan이라는 이름을 가진 열대지방의 나 무로 실제 등나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쉽게 말하여 대나무와 가까운 집안인데 속이 꽉 차있고 거의 덩굴처럼 수십m씩 길게 자라는 것이 대나무 와 다르다.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천연기념물 89호 등나무는 흔히 용등(龍藤)이라 하는데, 애처로운 전설이 전해온다. 신라시대 이 마을에는 마음씨 착한 두 자매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는데 마침 옆집에 늠름하고 씩씩한 청년이 있어 두 자매는 마음속 깊이 청년을 사모하고 있었다.

어 느 날 청년은 변방에 전쟁이 일어나 갑자기 싸움터로 떠나버렸다. 손 꼽아 기다린 보람도 없이 청년이 전사했다는 풍문이 두 자매의 귀에까지 들려오자 두 자매는 마을앞 용림이라는 연못에 몸을 던져버렸다. 다음 해 봄 전에 없던 등나무 두 그루가 연못가에 자라기 시작하였다.

얼마후 죽었다던 그 청년은 훌륭한 화랑이 되어 마을로 돌아왔다. 두 자 매의 사연을 듣고 괴로워하던 그 청년도 어느 달 밝은 밤 연못에 풍덩 뛰 어들어 버렸다.

다 음해 봄이 되자 마땅히 타고 올라갈 나무를 찾지 못하여 바람에 흔들 리기만 하는 두 그루의 등나무 옆에 한 그루의 팽나무가 갑자기 쑥쑥 자라 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등나무는 이 나무를 의지하여 크게 자랐 으며 사람들은 용림에서 자란 등나무란 뜻으로 용등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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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모란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 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리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조지훈의 시 '고사(古寺)'에서처럼 모란은 봄이 무르익어 가는 산사(山 寺)의 대표적인 꽃이다.

화려하고 복스럽게 피는 모란은 예로부터 화왕(花王)이라 하여 꽃 중의 꽃으로 꼽았으며, 아름다운 여인을 흔히 모란꽃 같다고 하듯이 최고의 아 름다움이었고 부귀의 상징이었다.

민 화풍으로 그려진 모란도(牧丹圖)는 혼례용 병풍으로 쓰였으며 고려청 자 상감의 꽃무늬, 분청사기의 꽃, 나전칠기의 모란당초(牡丹唐草), 수놓 은 꽃방석, 와당(瓦當)의 무늬, 화문석의 밑그림까지 모란의 상징성을 살 린 쓰임새는 끝이 없다.

설 총은 모란에 비유한 화왕계(花王戒)라는 설화를 지어 후세의 임금이 덕목으로 삼도록 하였다. "꽃 나라를 다스리는 화왕은 찾아오는 많은 꽃 중에서 아첨하는 장미를 사랑하였다가 뒤에 할미꽃 백두옹(白頭翁)의 충직 한 모습과 충언에 감동하여 정직한 도리를 숭상하게 된다"는 내용이 삼국 사기 열전에 실려있다.

고려 예종17년(1122) 왕이 아끼는 신하들을 불러 모란에 관한 시를 짓게 하였는데, 시 잘 짓기로 명성을 날렸던 강일용은 그 날 따라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아 초고를 소매에 넣고 나가서 대궐 뜰 개천에 쳐 넣어 버렸다 . 왕이 환관을 시켜 가져다가 보고, 다른 사람이 일등을 하였더라도 이는 옛 사람의 말한 바와 같이 "늙은이에게는 온 얼굴에 꽃 장식을 하더라도 서시(西施)의절반 단장만 못하다"는 것과 같다고 그를 위로하여 돌려보냈 다는 고려사 기록이 있다. 임금과 신하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인간미를 보 는 것 같다.

연산10년(1504) 모란 한 송이를 승지들에게 내려보내고 율시를 지어 바 치도록 하였으며, 팔도의 관찰사에게는 품종이 좋은 모란꽃을 올려보내라 고 하였다. 연산군은 모란꽃을 각별히 좋아하여 가까이 있던 신하는 율시 를 짓느라 머리 썩히고, 지방관은 모란이 혹시 잘못될까 봐 전전긍긍하였 다.

이렇게 모란을 노래한 시는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모란꽃이 모두 떨어져 가버린 봄을 아쉬워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모 란은 사람 키 남짓하게 자라고 가지는 굵고 성기게 갈라진다. 작은 잎 은 달걀모양인데 3-5개로 갈라지고 뒷면은 잔털이 있으며 대개는 흰빛이 돈다. 신라 선덕여왕(632-647)때 당나라 태종이 모란꽃 그림과 씨 3되를 함께 보내와서 처음 심게 되었다.

꽃 의 색깔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가 있었으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의 내 용 중에는 '홍모란, 백모란, 정홍모란(丁紅牡丹)'이 등장한다. 조선 인조 23년(1646)에 일본은 '청, 황, 흑, 백, 적모란'을 색깔별로 보내달라고 하 였으나 다른 색깔은 없다고 가장 흔한 적모란만 보내주었다.

동의보감에 보면 모란뿌리는 여자의 월경이 없는 것과 피가 몰린 것, 요 통을 낫게 하며 몸푼 뒤의 모든 혈병(血病), 기병(氣病), 옹창을 낫게 한 다하여 여러 부인병에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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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보리수나무


우 리나라 산길의 어디에서나 흔히 만나는 나무에 보리수란 이름을 달고 있는 나무가 있다. 갸름하게 생긴 잎의 뒷면에 아주 짧은 은빛 털이 촘촘 하여 마치 은박지같은 잎을 달고 있는 자그마한 나무이다. 이 나무는 석가 가 득도하였다는 보리수(菩提樹)와 발음이 같아 불교신자들로부터 격에 어 울리지 않게 대접을 받는다.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서 6년간에 이르는 고행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때 석가가 도를 깨친 나무는 인도보리수로 서 아열대 지방에 자라는 뽕나무무리의 무화과 종류에 포함되는데 높이 30m, 지름이 2m정도나 되는 큰 상록수이다. 인도가 원산지이며 가지가 넓 게 뻗어서 한 포기가 작은 숲을 형성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란다. 이 나무 를 불교에서는 범어로 마음을 깨쳐준다는 뜻의 odhidruama라고 하며 Pip pala 혹은 o라고도 하였는데,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한자로 번역할 때 그대로 음역하여 보리수(菩提樹)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러나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는 진짜 부처님이 도를 깨친 인도보리수는 추워서 자랄 수 없으므로 불교신자들은 대용 나무가 필요하였다. 이에 스 님들은 추운 지방에서도 잘 자라는 피나무를 보리수란 이름을 붙여 널리 심기 시작하였다. 피나무 무리들은 단단하고 새까만 열매가 흔하게 달려서 염주로 쓸 수 있고 잎이 하트모양으로 인도보리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 리나라 절에 보리수, 즉 피나무를 심기 시작한시기는 명확하지 않으 나 고려사에 보면 명종11년(1141) 2월 '묘통사 남쪽에 있는 보리수가 표범 의 울음소리와 같은 소리로 울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적어도 고려 초 이 전부터, 아마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부터 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산에는 불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예로부터 '보리 수'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연산군 6년(1499) '동백나무 5-6그루를 각기 화분에 담고 흙을 덮어 모두 조운선에 실어보내고, 보리수 (甫里樹) 열매는 익은 다음에 봉하여 올려보내라' 하였다.

열 매는 손가락 첫마디만 한데 앵두처럼 붉고 하얀 점이 점점이 있다. 간 식거리로는 충분히 먹을 만하여 임금님에게 진상하였던 것이다. '보리(甫 里)'라는 곳에서 나는 열매나무란 의미로 생각되며 오늘날의 보길도나 노 화도가 아닌가 추정해 본다. 남쪽 섬 지방의 보리수는 세월이 지나면서 보 리장나무, 보리밥나무로 이름이 변해버리고 육지에 있는 비슷한 나무는 그 대로 보리수란 이름으로 남아 절에 있는 보리수와 혼동하게 되었다.

한편 모감주나무, 무환자나무 등 염주를 만들 수 있는 열매를 가진 나무 는 한자로는 흔히 보리수라고도 하여 나무이름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 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절에 심겨진 보리수는 석가모니가 도를 깨친 그때 그 나무가 아니라 피나무 무리의 한 종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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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불두화


메 마른 사막의 선인장도, 진흙구덩이의 연꽃도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긴긴 인고의 세월을 말없이 기다린다. 꽃이란 바로 식물의 생식기 관으로서 암수의 화합이 이루어져 씨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암수가 서로 움직여 짝을 찾을 수 없는 식물의 입장에서는 아름다운 자태에다 향 기를 내고 꿀을 만들어 곤충을 꾀어야 수정이란 단계를 거칠 수 있다.

그런데 암술도, 수술도 갖지 않고 꽃잎만 잔뜩 피우는 멍청이 꽃나무도 있다. 자연적으로 생기기도 하며 사람이 이리 저리 붙이고 떼고 하여 만들 어 내기도 하는데 이름하여 무성화(無性花)이다.

초 파일을 전후하여 대웅전 깊숙이 새하얀 꽃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꽃나무가 있다. 사람 키 남짓한 높이에 야구공 만한 꽃송이가 저들 자신조 차 비좁도록 터질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 꽃나무가 바로 불두화로서 대 표적인 무성화의 하나이다. 자라는 땅의 산도(酸度)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처음 필 때에는 연초록 빛깔이며 완전히 피었을 때는 눈부신 흰색이 되고, 꽃이 질 무렵이면 연보랏빛으로 변한다.

꽃 속에 꿀샘은 아예 잉태하지도 않았고 향기를 내뿜어야할 이유도 없으 니 벌과 나비가 처음부터 외면해 버리는 꽃이다. 매년 5월이 돌아오면 누 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꽃을 피워야 할 계절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살아있 는 꽃'이지만 아무래도 벌과 나비가 없는 불두화는 생명감이 크게 느껴지 지 않는 서글픔이 있다.

다행이 그는 부처님과의 인연으로 석화(石花)의 서러움을조금은 면하게 되었다. 심은 곳의 대부분이 절간이고 꽃의 모양이 마치 짧은 머리카락이 꼬부라져 나발형(螺髮形)을 이루고 있는 불상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불두화 (佛頭花), 혹은 승두화(僧頭花)란 분에 넘치는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씨도 없는 불두화의 자손은 꺾꽂이나 접붙이기로 퍼져나가지만 자신의 조상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백당나무이다. 산지의 습한 곳에서 높이 약 3m 정도로 자라는 작은 나무인데 잎은 마주나고 끝이 3개로 크게 갈라져서 가장자리에 굵은 톱니가 있다.

꽃 은 주먹만한 크기로 작은 우산을 펴놓은 것 같은 꽃차례로 둥글게 달 린다. 안쪽에는 암꽃과 수꽃을 모두 가지는 정상적인 꽃, 즉 유성화(有性 花)가 달리고 바깥쪽에는 새하얀 꽃잎만 가진 무성화가 피어 있어서 달리 보면 전체 모양이 마치 접시를 올려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백당나무에서 돌연변이가 생겼거나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수꽃만 달 리게 육종(育種)한 것이 바로 불두화이다.

북한에서는 백당나무를 접시꽃나무, 불두화를 큰접시꽃나무라고 부른다. 일찍부터 한글전용을 하여온 북한은 아름다운 우리말 식물이름을 많이 만들었지만 백당나무나 불두화가 북한이름보다 꼭 나쁜 이름이라고는 생각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주도에 자라는 나무 중에 중대가리나무란 이름이 있는데 북한 이름은 머리꽃나무이다. 통일의 그 날이 오면 이런 이름들은 그대로 우리 가 따라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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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팝나무


이 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사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 얼마전이었다. 이밥은 이(李)씨의 밥이란 의미로 조선왕 조시대에 벼슬을 해야 비로소 이씨인 임금이 내리는 흰쌀밥을 먹을 수 있 다하여 쌀밥을 이밥이라 하였다.

이 팝나무는 이밥나무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꽃의 여러가지 특징이 이밥, 즉 쌀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팝나무는 키가 20-30m나 자라고 지름 도 몇아름에나 이르는 큰 나무이면서 5월 중순, 아카시아 꽃과 거의 같이 파란 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꽃을 가지마다 소복소복 뒤집어쓰는 보기드문 나무다.

가느다랗게 넷으로 갈라지는 꽃잎 하나하나는 마치 뜸이 잘든 밥알 같이 생겼고, 이들이 모여서 이루는 꽃 모양은 멀리서 보면 쌀밥을 수북이 담아 놓은 흰 사기밥그릇을 연상하게 한다.

꽃이 필 무렵은 아직 보리는 패지 않고 지난해의 양식은 거의 떨어져 버 린 보릿고개이므로 주린 배를 잡고 농사일에 열중하면 헛것으로도 쌀밥이 보일 정도로 힘든 계절이다. 이때 이팝나무 꽃은 쌀밥과 너무나 닮아 있다.

이 름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꽃피는 시기가 대체로 양력 5월5.6일경인 입하(立夏) 무렵이어서 '입하 때 핀다'는 의미로 입하나무로 부르다가 이 팝나무로 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라북도 일부 지방에서는 '입하목'으 로도 부른다니 발음상으로 본다면 더 신빙성이 있는 지 모른다.

그러나 짧게는 수백년 길게는 수천년 전의 우리 선조들이 자연스럽게 붙여놓은 이름을 오늘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말하기는 어렵다. 둘 다 충분 한 이유가 있으며 더더욱 쌀 농사의 흉.풍년과 관계가 있으니 나름대로 음 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경 상북도 남부에서 전라북도의 중간쯤을 잇는 선의 남쪽에 주로 자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만도 8그루나 돼 은행나무, 소나무, 느티나 무에 이어서 네번째로 많은 나무다. 그러나 186호 양산 석계리 이팝나무는 1999년에 죽어 버려 현재는 7그루가 남아 있다.

이외에도 시.도기념물, 보호수로 지정된 이팝나무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이다. 대부분 정자목이나 신목(神木)의 구실을 하였으며 꽃피는 상태 를 보고 한해의 농사를 점쳤다고 한다.

나이가 500년이나 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팝나무는 경남 김해시 주촌면 천곡리 신천리의 천연기념물 307호이다.

이팝나무는 일본과 중국의 일부에도 자라나 세계적으로 희귀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나무를 처음 본 서양인들은 쌀밥을 알지 못하니 눈이 내린 나무로 보아 눈꽃나무(snow flower)라 하였다.

어 린줄기는 황갈색으로 벗겨지나 나이를 먹는 나무의 껍질은 회갈색으로 세로로 깊게 갈라진다. 잎은 마주나기하고 타원형이며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이며 표면에는 매끈한 광택이 있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잎의 모 양이나 크기가 언뜻보면 감나무와 비슷하다. 열매는 콩깍지 모양이고 짙은 푸른색이며 9-10월에 익고 겨울까지 계속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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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철쭉


봄 의 끝자락 5월 중하순에 들어서면 소백산, 지리산, 태백산 등 전국 높 은 산꼭대기에 군락으로 자라는 철쭉은 분홍빛 꽃모자를 뒤집어쓴다. 산기 슭의 큰 나무 그늘부터 바람이 생생 부는 높은 산의 꼭대기까지 어디에나 잘 살아갈 만큼 철쭉은 생명력이 강하다.

진달래와 철쭉종류(철쭉, 산철쭉, 영산홍)는 꽃 모양이 비슷하여 관심 있는 이들도 혼란스러워한다. 우선 진달래는 꽃이 먼저 핀 다음에 잎이 나 오므로, 꽃과 잎이 같이 피는 철쭉 종류와는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철 쭉은 가지 끝에 작은 주걱모양으로 매끈하게 생긴 잎이 너댓장 돌려 나며 꽃빛깔이 아주 연한 분홍빛이어서 오히려 흰 빛깔에 가깝다. 그래서 남부지방에서는 색이 연한 진달래란 뜻으로 '연달래'라고도 한다. 산철쭉 은 잎 모양이 새끼손가락 정도의 길이에 버들잎처럼 길고 갸름하게 생겼으 며 꽃빛깔은 붉은 빛이 많이 들어간 분홍빛이어서 오히려 붉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그러나 영산홍(暎山紅)은 영 복잡하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주로 개량하 여 보급되는 나무이나, 분류학의 체계가 거의 완전히 잡혀 있는 오늘날도 영산홍만은 '개념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고 교과서에도 적혀 있 을 정도다.

모 양새는 산철쭉과 비슷한 품종이 많아 서로 구분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들은 갸름한 좁은 잎사귀에 진달래처럼 생긴 꽃이 피 는 자그마한 나무가 산에 자라면 산철쭉, 정원에 심어진 것은 영산홍으로 아는 수밖에 없다.

옛 사람들은 철쭉을 척촉( )이라하였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나가던 나그네가 자꾸 걸음을 멈추어 철쭉 척( )자에 머뭇거릴 촉( )자를 썼다 하 며, 또 다른 이름인 산객(山客)도 철쭉꽃에 취해버린 나그네를 뜻한다.

삼 국유사에 보면 성덕왕(702-737) 때 순정공(純貞公)의 부인 수로(水路) 는 신라 제일의 미인이었다. 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따라나선 수로부인은 천길 절벽에 매달린 철쭉을 따 달라고 한다. 주위의 모든 사람 이 위험하다고 거절하자 지나가던 노인이 몰고 가던 암소를 팽개치고 절벽 에 기어올라 철쭉꽃을 따다 노래까지 지어 바쳤다.

동 국이상국집에도 철쭉에 대한 시가 실려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철쭉, 영산홍, 일본철쭉이 서로 뒤섞여 여러 번 기록되어 있고, 강희안의 양화 소록에는 세종23년(1441) 봄에 일본에서 철쭉 두 화분을 보내왔다고 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영산홍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산림경제에도 일본 철쭉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즐겨 심고 가꾸는 영산홍이 기록처럼 적어도 조선 왕조 이전에 일본에서 수입된 꽃나무인지, 아니면 우리의 산에 흔히 자라 는 산철쭉이나 철쭉을 말하는 또 다른 이름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철쭉꽃에는 마취성분을 포함한 유독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양(羊)이 철쭉을 잘못 먹으면 죽기 때문에 양척촉(羊 )이라는 이름이 있 다고 본초도감에 적혀 있으며, 음력 3-4월에 꽃을 따서 말린 것을 약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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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찔레꽃


숲 의 가장자리나 돌무더기가 많은 양지 바른 곳에 늦은 봄이면 가느다란 줄기가 길게 늘어지면서 새하얀 꽃이 달리는 가시덩굴이 있다. 목련꽃처럼 너무 크지도, 조팝나무 꽃처럼 너무 작지도 않은 찔레꽃은 5장의 꽃잎에 펼쳐지는 백옥의 향연을 보는 듯하다. 꽃의 질박함이 유난히도 흰옷을 즐 겨 입던 한민족의 정서에도 맞는 우리의 토종 꽃이다.

찔레꽃은 해맑은 햇살을 좋아하지만 우거진 숲 속에서도 조그만 틈만 있 으면 꿋꿋이 피어나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낸다.

"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 삼간 그립습니다. .."라는 흘러간 유행가가 있다. 고향산천과 아련한 유년의 추억을 그림처 럼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그러나 찔레꽃은 붉게 피지 않는다. 아마 해당 화 꽃을 찔레로 착각한 작사자의 탓일 것이다.

가난한 집의 어린이들은 찔레꽃을 꽃으로 감상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배 고픔의 현실이 너무 절박하였다. 보릿고개를 아는 이라면 봄에 돋아나는 연한 찔레순의 껍질을 벗겨 먹었던 일이 아픔으로 남는다. 가벼운 단맛이 있어서 아이들한테 좋은 간식거리가 되었고 요즈음의 눈으로 본다면 비타 민과 각종 미량원소가 들어 있는 찔레순은 어린이의 성장발육에 큰 도움이 된다.

찔레꽃이 필 무렵에는 모내기가 한창인 계절이다. 안타깝게도 이 중요한 시기에 흔히 가뭄이 잘 든다. 그래서 특히 이때의 가뭄을 '찔레꽃 가뭄'이 라고도 한다.

가 을철에 굵은 콩알 크기로 빨갛게 익는 열매는 귀엽고 앙증맞을 뿐만 아니라 영실(營實)이라하여 약으로 쓴다. 동의보감에는 '맛이 쓰고 시며 악성종기, 부스럼, 성병이 잘 낫지 않을 때나 두창(頭瘡), 백반병 등에 쓴 다'고 하였다.

열 매를 소주에 담가서 만든 황금빛의 찔레술(營實酒)은 적당히 신맛이 있다. 꿀이나 설탕을 가미하면 풍미도 일품이며, 향내가 좋아 진귀한 약술 이 된다. 비타민 C가 풍부하며 신장병, 월경불순, 설사 등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찔레 뿌리도 열매와 마찬가지로 약제로 쓰인다.

서양에서는 찔레뿌리로 만든 담배파이프가 유명하다. 최고급 남성용품의 대명사로 꼽히는 던힐의 창업주 앨프리드 던힐(A.Dunhill)은 35세 때인 1 907년 런던 듀크가(街)에 담배 가게를 열면서 찔레뿌리로 아름답게 수가공 (手加工)한 파이프를 만들어냄으로써 명성을 떨치는 계기를 잡았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는 낙엽활엽수 관목으로 키가 2m정도이나 가지 끝이 밑으로 처져서 덩굴 모양을 한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작은 잎이 5-9개로 이루어진다. 작은 잎은 메추리알 크기만 하고 타원형이며, 양끝이 좁고 길 이 2-3cm로 톱니가 있다. 빗살 같은 톱니를 가진 탁엽이 잎자루와 합쳐진 다. 꽃은 새 가지 끝에 원뿔모양의 꽃차례로 달리고 5월부터 피기 시작하 며 지름 2cm정도로 흰빛이나 연분홍 빛으로 핀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맛을 주는 조경수로 적당하나 찔레를 담장에 올리 면 상을 당한다고 하여 생울타리로는 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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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때죽나무


오월 중순이 지날 즈음, 층층이 뻗은 자그마한 나무 가지의 짙푸른 잎사 귀 사이에 새하얀 꽃들이 2-5개씩 뭉쳐서 줄줄이 아래로 매달려있는 꽃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바로 이름도 귀여운 때죽나무이다.

개개의 꽃은 엄지 첫 마디만하고 작은 종(鐘) 모양으로 앙증맞게 생겼다. 절에서 흔히 보는 동양의 범종과는 달리 윗부분은 원통형에 가깝고 입이 크게 벌어진 서양 종의 모양이다.

다섯 장의 새하얀 꽃잎으로 감싼 노랑 수술은 끈을 매달아만 놓아도 산 들바람으로 부딪혀 금세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질 것 같다. 그래서 영어로 는 'snowbell'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하다.

대 부분의 꽃들이 하늘을 향하여 태양을 마주보고 '나 얼마나 예뻐요?'하 듯 뽐내는데 여념이 없으나, 때죽나무 꽃은 치마꼬리 살짝 잡고 생긋 웃는 수줍은 옛 처녀 마냥 다소곳이 땅을 향하여 피어 있다. 멀리서는 백옥 같 은 꽃잎의 옆모습밖에 볼 수 없으니 꼭 앞 얼굴을 보고 싶은 이는 나무 밑 에 들어와서 살짝 쳐다보라는 뜻이다.

가 을이 무르익어 가면 크기가 손가락 첫 마디만하고 아래위가 약간 뾰족 한 열매가 처음 달릴 때는 초록색으로 시작하여 갈색으로 익어가는 모양이 너무 귀엽고 깜찍하다. 여기에는 유지(油脂)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예부터 동백나무가 자라지 않은 북쪽지방에서는 등유나 머릿기름으로 이용 되었다.

열매나 잎 속에는 사포닌을 주성분으로 하는 마취성분이 들어 있어서 이 를 찧어 물에 풀면물고기는 순간적으로 기절해 버린다. 간단히 고기잡이 에 쓰였으나 사람도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구토를 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하 여야 한다.

최 근 오염환경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식물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때죽나 무는 공해물질의 배출이 많은 공장 가까이서도 잘 자라는 대표적인 나무이 다. 예쁜 꽃과 열매를 감상할 수 있고 공해에도 잘 견디는 때죽나무에 우 리 모두 관심을 가져 볼만하다.

때죽나무의 속살은 너무 해맑고 깨끗하며 세포의 크기와 배열이 거의 일 정하여 나이테 무늬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유빛 아름다운 피부 만을 곱게 내보인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빗물을 깨끗이 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가 로수로 적당한 나무가 우리나라에는 없다고 버즘나무, 은단풍, 튤립나 무 등 외래종 나무심기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때죽 나무처럼 청초한 흰 꽃과 귀여운 열매, '몽당비'처럼 자르지 않아도 적당 한 크기로 자라는 등 가로수로 알맞은 '토종 우리나무'가 얼마든지 있다.

쪽동백나무는 때죽나무와 같은 무리에 속하는 친형제 나무이다. 옥령화 (玉鈴花)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때죽나무와 비슷하지만 잎 모양과 꽃이 달리는 차례가 다르다. 잎은 거의 둥글고 크기가 손바닥을 편 것 만 하며 꽃은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20여개씩 달리는 것이 쪽동백나무, 잎은 타원형이고 작으며 꽃은 2-5개씩 달리는 것이 때죽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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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함박꽃나무


꽃 모양이 한약재로 널리 쓰이는 작약, 즉 함박꽃과 너무 비슷하여 나무 에 피는 '함박꽃'이란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함박꽃나무와 목련(木 蓮)은 식물학적으로도 한 식구이고 꽃이나 잎 모양이 매우 닮았으며 주로 산 속에 자라므로 흔히 함박꽃나무는 산목련이라고도 부른다.

북한의 국화는 진달래로 알고 있었으나 최근 함박꽃나무, 그들의 이름으 로는 목란(木蘭)임이 알려졌다. 목란은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하던 시절에 처음 발견하였으며 이름도 없었는데 60년대 후반 직접 목란이란 이름을 지 어 붙였다고 한다.

그 이후 목란은 귀중한 나무로 취급 받았으며 91년 4월에 공식적으로 국 화로 지정했다. 김일성 저작집 16권에도 '우리나라에 있는 목란이란 꽃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향기도 그윽하고 나뭇잎도 보기가 좋아서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입니다'하여 심기를 장려한 것 같다.

김일성과 연관이 있는 북한의 대형 건축물에는 대부분 목란꽃 문양이 들 어있다. 금수산 의사당 밑바닥, 혁명사적지를 비롯하여 95년 8월에 판문점 북측지역에 세워진 김일성의 친필비석에도 그의 사망 당시 나이를 상징하 는 82송이의 목란꽃이 새겨져 있다 한다.

또 각종 공문서의 바탕에는 우리나라가 무궁화 그림을 넣는 것처럼 목란 꽃이 연하게 깔려있고, 평양 창광거리에서 최고시설을 자랑하는 종합연회 장도 목란관이다. 가극 '금강산의 노래'에서도 목란은꽃 중의 꽃으로 숭 상하고 있다.

그 러나 김일성이 처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신격화의 일단일 따름이고 산목련, 함백이, 개목련, 함박꽃나무란 이름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나무이다. 자라는 곳이 인가 근처가 아니라 깊은 산 계곡이므로 사람들 눈 에 잘 띄지 않았을 따름이다.

목란이란 원래 목련의 다른 이름으로 불려 왔으나, 이제는 북한이 이미 붙여둔 이름이니 함박꽃나무와 함께 사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목 련은 꽃이 먼저 핀 다음 잎이 나오나 함박꽃나무는 잎이 다 펼쳐진 다 음 꽃이 핀다. 꽃은 늦봄에서 초여름에 새 가지 끝에 달리며 6장의 하얀 꽃잎으로 둘러 쌓인 수술은 붉은 빛을 띤 보라색이다. 자칫하면 크다란 초 록색 잎사귀에 묻혀 심심해져 버릴 하얀 꽃에 악센트를 주며 꿀을 따는 벌 을 위하여 은은한 향기도 내뿜는다.

꽃은 당당하게 하늘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곳이 땅을 향하여 피는 모양은 소복 입은 청상과부의 조심스런 몸가짐에서 풍기듯 깔끔하고 정갈 한 느낌이다.

전 국의 산골짜기 숲 속에 자라는 작은 나무로서 키가 7-10m, 굵기는 발 목 굵기 정도가 고작이다. 줄기는 여러 포기가 나와 비스듬하게 자라는 경 우가 흔하고 껍질은 회색이며 갈라지지 않는다. 잎은 어린아이 손바닥만하 고 감나무 잎처럼 생겼으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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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앵두나무


이름으로 앵도나무와 앵두나무 양쪽을 다 쓴다. 그러나 한자 이름에서 온 앵도(櫻桃)나무가 더 맞는 이름이다. 또 열매는 꾀꼬리가 먹으며 생김 새가 복숭아와 비슷하기 때문에 앵도(鶯桃)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잘 익은 앵두의 빛깔은 붉음이 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티 없이 맑고 깨끗하여 바로 속이 들여다보일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빨간 입술과 흰 이를 아름다운 여인의 기준으로 삼았던 옛 사람들은 예쁜 여인 의 입술을 앵두같은 입술이라 하였다.

흔히 우리는 사람의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고 입술은 관능의 창이라 한다. 표면에는 자르르한 매끄러움마저 있으니 작고 도톰한 입술이 촉촉이 젖어있는 매력적인 여인의 관능미를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조 선초기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는 세종이 앵두를 좋아하였으므로 효 자인 문종은 세자시절 경복궁 안 울타리마다 손수 앵두를 심고 따다 바쳤 다. 세종이 맛보고 '다른 곳에서 바친 앵두가 맛있다 하여도 어찌 세자가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느냐'고 무척 흐뭇해하였다고 한다.

성종25년(1492) 철정이란 관리가 임금께 앵두를 바치자, '성의가 가상 하니 그에게 활 1장을 내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 관리는 연산3년(149 6)에도 또 임금께 앵두를 바쳐 각궁(角弓) 한 개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억! 억! 하는 돈을 내놓고도 권력자의 눈 밖에나 하루아침에 망해버 린 어느 기업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앵두 한두 쟁반에 임금님의 환심을 살 수 있었던 그 때그 시절을 부러워 할 것 같다.

앵 두는 단오 전후 모든 과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익기 때문에 고려 때부 터 제물(祭物)로도 매우 귀하게 여겼고, 약재로도 쓰였다. 동의보감에 는 '중초(中焦)를 고르게 하고 지라의 기운을 도와주며 얼굴을 고와지게 하고 기분을 좋게 하며 체하여 설사하는 것을 멎게 한다'고 하였다.

또 앵두나무 잎은 뱀에게 물렸을 때 짓찧어 붙이고, 동쪽으로 뻗은 앵두 나무뿌리는 삶아서 그 물을 빈 속에 먹으면 촌충과 회충을 구제할 수 있다 고 하였다.

앵 두나무는 수분이 많고 양지 바른 곳에 자라기를 좋아하므로 동네의 우 물가에 흔히 심었다. 고된 시집살이에 시달린 한 많은 옛 여인네들은 우물 가에 모여 앉아 시어머니로부터 지나가는 강아지까지 온 동네 흉을 입방아 찧는 것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였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로 시작되는 유행가 가사처럼 공업화가 진행된 70년대 초, 소문으로만 듣던 서울로 도망칠 모의(?)를 한 용감한 시골 처녀들의 모임방 구실을 한 것도 역시 앵두나무 우물가이었다.

중 국 화북 지방이 원산지이고 사람 키를 조금 넘기는 정도로 자라는 작 은 나무이다. 어린 가지에 곱슬곱슬한 털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모양 이며 가장자리에 가는 톱니가 있고 손가락 길이 정도이다. 4월에 잎보다 먼저, 또는 새잎과 거의 같이 엄지손톱 만한 꽃이 새하얗거나 연분홍색이 으로 1-2개씩 모여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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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산딸나무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은 어디 가고 백골만 묻혔느냐 잔 들어 권할 이 없어 그를 서러워 하노라."

조선 중기의 문신 임제(林悌, 1549-1587)가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부임 하는 길에 황진이의 묘를 찾아 읊조린 시 한 수이다.

산 딸나무는 붉은 흙이 그냥 보이는 야산에 자라지 않는다. 지리산 달궁 계곡이나 무주구천동 등 '청초 우거진' 깊은 산골의 숲 속에서 다른 나무 들에게 시달리면서 자란다. 온통 초록의 바다 속에서 산딸나무는 어디에 묻혀 있는지 눈 씻고 보아도 찾아내기 어렵다.

그러나 녹음이 짙어 가는 초여름에 들어서는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진 예쁜 스타처럼 사람들을 눈부시게 한다. 진한 초록의 잎새로 호위를 받으 면서 새하얀 꽃이 마치 층을 이루듯이 무리 지어 피므로 멀리서 보아도 청 초하고 깨끗한 자태를 금세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숭아꽃, 살구꽃 등 흔히 보는 꽃들은 대부분 꽃잎이 5개씩 달리는 것 과는 달리 산딸나무 꽃잎은 4장이 달린다. 엄밀히 말하면 순수한 꽃잎이 아니라 잎이 변하여 꽃잎처럼 보일 따름이다.

이들은 크기가 엄지손가락만 하고 처음에는 연초록이나 완전히 피면 새 하얗게 되며 꽃이 질 무렵에는 끝 부분이 붉은 자주빛으로 변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하트모양으로 두 장씩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십자가(十字架) 모양을 이룬다.

예 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쓰인 나무는 무엇일까. 믿음에 가까이 가 지 못한 보통사람들은 쓸데없이 이런 일에나 관심이 많다. 올리브나무일 것이라고도 하나 우리나라의 산딸나무와 비슷한 종류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영어로 산딸나무를 포함한 층층나무 무리를 Dogwood라고 하는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이 나무를 연상하게 한다.

굵 은 산딸나무 목재를 켜서 대패질한 나무표면을 보면 이 나무가 예수님 과 감히 관련을 지울 만큼 성스러운 나무인지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속살은 트레이드마크인 하얀 꽃잎을 연상할 만큼 맑고 깨끗하다. 꽃과 나 무결 모두 해맑은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보고 있는 듯한 품격 높은 나무이 다.

중부 이남에 자라는 큰 나무로서 숲 속에서는 한 아름이 넘게 자라기도 한다. 가지 퍼짐은 사촌뻘 되는 층층나무를 닮아 층을 지어 수평으로 뻗어 나간다. 나무 껍질은 회갈색으로 나이를 먹어도 갈라지지 않고 매끄러우며 큰 얼룩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잎은 마주 나고 갸름하게 생겼으며 달걀크기 만하다. 잎맥이 활처럼 휘 어서 잎 끝으로 몰리는 형태이며 가장자리는 밋밋하거나 잔물결모양의 톱 니가 있다.

가 을이 되면 우리가 흔히 먹는 딸기와 비슷하게 생긴 열매가 진분홍색으 로 익는다. 달콤하고 육질이 많아 먹을 수 있다. 산딸나무라는 이름은 이 열매의 모양이 딸기를 닮았기 때문이다. 나무는 단단하고 질기므로 방적용 북의 재료를 비롯하여 농기구, 자루, 망치, 절구공이 등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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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밤나무


여름의 발걸음이 차츰 빨라지는 6월 중순쯤 윤기 자르르한 초록 잎이 달 린 큰 나무에 잿빛 가발을 쓴 것 같은 밤꽃은 산자락에서 쉽게 눈에 띈다.

꽃 이 한창 피어 있을 때 코끝을 스치는 꽃 냄새는 향기로움으로 가득 찬 다른 꽃들과는 달리 살짝 쉬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맡으면 시큼하기 도 한 묘한 냄새가 난다. 바로 인간 생명의 근원인 남자의 정액냄새와 영 락없이 같단다. 그래서 이 냄새를 부끄러워한 옛 부녀자들은 밤꽃이 필 때 면 외출을 삼갔고 과부는 더욱 근신하였다 한다.

그러나 꽃이 흐드러지게 많이 피고 꿀을 충분히 갖고 있어서 밤꿀을 생 산하는 꽃이기도 하다.

밤 속에는 전분과 단백질이 풍부하고 달큼함을 느낄 만큼의 당분도 들어 있어서 예부터 식량자원으로 재배를 장려하였으며 낙랑고분 및 가야고분에 서도 밤알이 출토된 바 있다.

밤은 제물(祭物)로서도 중히 여긴다. 밤알이 보통 3개씩 들어 있으므로 후손들이 출세의 대명사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대표되는 3정승을 온 집안에서 나란히 나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보다 구체적인 해석은 밤이 싹이 틀 때의 모양에서 찾는다. 밤 껍질을 땅속에 남겨두고 싹만 올라오는데, 껍질은 땅 속에서 오랫동안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는 까닭에 밤나무는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는 나무라고 알려 져 있다.

밤송이는 '고슴도치야 게 섰거라' 할 만큼 완벽해 보이는 방어구조를 갖 고 있다. 날카로운 침만으로도 충분하련만 안에는 두껍고 단단한 껍질로 싸고그 안에는 또다시 떫은맛이 잔뜩 든 안 껍질이 있다.

천 려일실(千慮一失)이랄까? 이렇게 어마어마한 방비를 하고도 벌레침입 을 억제하는 물질을 껍질에 살짝 섞어두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생밤 을 치다 보면 토실토실(?) 살이 오른 밤벌레에 사람들은 질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밤을 수확할 무렵부터 껍질에 붙어 있던 벌레 알이 보관 과정 에 부화되어 껍질을 뚫고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진한 소금물을 만들 어 4~5일 담가두었다가 꺼내어 얼지 않는 음지에 모래와 함께 묻어두면 다 음 해 까지도 밤벌레 공포 없이 보관할 수 있다.

밤나무 목재는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조상숭배의 상징성 때문에 사당의 위패(位牌), 제상(祭床) 등 조상을 숭배 하는 기구의 재료로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가장 널리 쓰였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며 지름이 두세 아름까지 이르기도 한다. 경산 임당 의 신라초기 무덤에서 밤나무로 만들어진 나무 관이 나온 것으로 보아 옛 날에는 더 널리 쓰인 것 같다.

갸 름하고 길쭉하게 생긴 잎 가장자리의 톱니 끝은 짧은 침처럼 생겼다. 꽃이나 밤이 아직 달리지 않은 숲 속의 밤나무는 상수리나무와 잎 모양이 비슷하여 찾아내기 어렵다. 밤나무는 녹색의 엽록소가 잎 가장자리 침 끝 까지 들어있어서 침이 파랗게 보이는데 비하여 상수리나무의 잎 침에는 엽 록소가 들어 있지 않으므로 연한 갈색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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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모감주나무


녹 음이 짙어 가는 6월말이나 7월초가 되면 화려한 꽃으로 우리를 유혹하 던 나무들은 짙푸른 잎으로 뒤덮여 지난 꽃 세월은 흔적도 없어져 버린다. 이때쯤 진한 노랑꽃이 임금님의 왕관을 길게 장식하는 깃털 마냥 우아하 게 꽃대가 올라와 자그마한 꽃들이 줄줄이 달리는 나무가 바로 모감주나무 이다. 따가운 여름 태양에 너무 바래버린 듯 모감주나무의 꽃은 노랑꽃이 라고 하기 보다 오히려 고고한 금빛에 가까워 동화 속의 황금궁전을 연상 시키는 꿈의 꽃이다.

꽃대의 아래는 길이가 한 뼘이나 되는 잎자루에 아카시아 잎 마냥 작은 잎이 10-15개 씩 다닥다닥 달려있다. 가장자리에는 크고 깊은 톱니가 나 있는 잎이 약간 탁한 푸르름을 갖고 있어서 금빛 꽃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작 열하는 여름 태양과 경쟁하듯 버티고 있던 수많은 황금 꽃은 수정이 되고 나면 세모꼴 초롱모양의 앙증맞은 열매가 익어 가는 가을과 함께 크 기를 부풀려간다. 햇달걀크기 만큼이나 부풀려지면 얇은 종이 같은 껍질이 셋으로 길게 갈라지면서 속에는 금빛 꽃과는 엉뚱하게 새까만 씨앗 3개가 얼굴을 내민다.

굵은 콩알만하고 윤기가 자르르한 이 씨앗은 완전히 익으면 돌처럼 단단 해진다. 만질수록 손때가 묻어 더욱 반질반질해지므로 염주(念珠)의 재료 로 안성맞춤이다. 그것도 감질나게 몇 개씩 달리는 것이 아니라 54염주는 물론 108염주도 몇 꾸러미를 만들 수 있을 만큼 풍부하게 매달린다.

모감주나무의 씨앗은 금강자(金剛子)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금 강이란 말은 금강석의 단단하고 변치 않은 특성에서 유래되었겠으나 불가 (佛家)에서는 깨달은 지덕이 굳고 단단하여 모든 번뇌를 깨뜨릴 수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고려 숙종4년(1099) 임금은 상자사(常慈寺)에 머물면서 금강자와 수정염 주 각 한 꾸러미를 시주하였다 하고, 조선 태종6년(1406)에는 명나라 사신 이 금강자 3관을 예물로 바쳤다 하며 태종9년(1409)에도 기록이 있다. 이 처럼 예부터 왕실에서도 사용하는 귀중한 염주재료임을 알 수 있다.

염주를 만드는 구슬은 피나무 열매, 무환자나무 열매, 율무, 수정, 산 호, 향나무 등도 사용하나 금강자 염주는 큰스님들도 아끼는 귀한 애장품 이었다.

모 감주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서 우람한 모양새를 자랑하는 나무는 아니 지만 단아한 가지 뻗음과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한 잎, 황금 깃처럼 솟아오 른 금색 꽃, 초롱 속의 새까만 열매 , 가을에 만나는 루비빛 혹은 연노랑 단풍 등 다른 나무가 엿보기 어려운 독특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은 도로 옆이나 공원 녹지대의 조경수로 흔히 심는다.

옛날 중국에서는 임금에서 서민까지 묘지의 둘레나무로 심을 수 있는 나 무를 정해주었는데, 학덕이 높은 선비가 죽으면 모감주나무를 심게 할 정 도로 품위 있는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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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자귀나무


초 여름의 숲 속에서 짧은 분홍 실을 부챗살처럼 펼쳐 놓은 자그마한 꽃 들이 피어 주위를 압도하는 꽃나무가 있다. 길쭉길쭉한 쌀알처럼 생긴 잎 들이 서로 마주 보면서 깃털모양으로 촘촘히 달려있는 모양도 특별한 나무 가 바로 자귀나무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소가 특히 잘 먹는다 하여 소밥나 무 혹은 소쌀나무라고도 한다.

자귀나 무란 자는데 귀신같은 나무를 줄인 이름인가?.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상당한 근거가 있다. 초등학교 앞 노점 판의 인기품목이었던 미모 사(신경초)를 건드리면 금새 벌어져 있는 잎이 닫혀버리는 모양을 기억하 고 있을 것이다. 이는 광합성을 할 때 이외에는 잎을 닫아 버려 날아가는 수분을 줄여보자는 대책이다. 자귀나무는 경망스럽게 건드리는 정도로 일 일이 반응은 아니하고 긴 밤이 되어야 서로 마주 붙어 정답게 깊은 잠이 들어 버린다.

재 미있는 것은 50-80개나 되는 작은 잎이 짝수로 이루어져 있어서 서로 상대를 찾지 못한 홀아비 잎이 남지 않는다. 따라서 합환수(合歡樹) 혹은 야합수(夜合樹)라 하여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는 뜻으로 정원에 흔히 심는 다. 그러나 대낮에는 두꺼운 구름이 끼여 아무리 컴컴해도 잎이 서로 붙지 않는다. 자귀나무 잎의 수면운동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절제된 부부생활을 하라는 깊은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지도 모른다.

옛날 중국의 두양이라는 선비의 부인은 말린 자귀나무 꽃을 베개 속에 넣어 두었다가, 남편의 기분이 언짢아 하는 기색이보이면 조금씩 꺼내어 술에 넣어서 한잔씩 권했다. 이 술을 마신 남편은 금세 기분이 풀어졌으므 로 부부간의 사랑을 두텁게 하는 신비스런 비약으로서 다투어 본받았다 한 다.

또 겨울이 되면 콩꼬투리처럼 생긴 긴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서 수없이 달리는데, 세찬 바람에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옛 양반들의 귀에 꽤 나 시끄럽게 들렸나 보다. 그래서 여설수(女舌樹)란 이름도 붙여 두었다. 물론 조선조 제일의 석학 퇴계 이황마저 '무릇 여자란 나라이름이나 알고 이름석자나 쓸 줄 알면 족하다'고 일갈하여도 무방하던 시절에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껍 질은 합환피(合歡皮)라 하여 동의보감에 보면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며 근심을 없애서 만사를 즐겁게 한다고 한다. 또 민간에 서는 갈아서 밥에 개어 타박상, 골절, 류머티즘에 바르면 잘 듣고 나무를 태워 술에 타서 먹으면 어혈 등에 효과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황해도 이남에 주로 분포하며 그렇게 크게 자라지는 않으나 깊은 산 속 에서는 키가 10여m에 이르기도 한다. 나무껍질은 갈색바탕에 녹색이 들어 간 색깔인데 나이를 먹어도 흉하게 갈라지지 않고 다만 작고 동글동글한 숨구멍만 촘촘히 생긴다. 잎자루는 가지에 어긋나기로 붙어 있는데, 큰 잎 자루에서 또 한번 더 갈라져서 두 번 갈라진 셈이 된다. 줄기가 굽거나 약 간 드러눕는 모양이어서 목재로서의 큰 가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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