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8년 차의 귀띔 “도시 귀농인이 해 볼만 한 작물은 이것”
“10명 중 8,9명이 만족 합니다”
대 도시에서 자영업을 하다 실패하고 맨손으로 처가의 고향으로 들어간 김보성 씨. 그는 8년 만에 고사리농사로 생활의 안정을 되찾고 건강도 좋아졌다. 고사리를 선택한 이유, 고사리농사를 지으며 땀 흘린 과정, 남다른 소득의 비결 등을 들어보았다.
귀 농의 가장 큰 현안은 무얼 먹고 사는가 하는 문제이다. 농사 경험이 전무한 50~60대의 도시 귀농인이 실제로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건 무리다. 퇴직금, 연금 등의 여유가 있는 그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귀농보다는 전원생활이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시골에서 여생을 편안하게 지내자는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러나 30~40대는 사정이 다르다. 젊은 그들은 상대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다. 당장 뭔가를 해서 수익을 내야 한다. 그렇다면 길은 뻔하다. 농사다. 물론 시골서 운전도 할 수 있고 음식점도 할 수 있지만 그런 걸 하려고 구태여 시골까지 찾아들어갈 이유가 없다. 결국 농사이다. 논. 밭농사나 축산, 과수 아니면 버섯 같은 특용작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벼농사는 수입개방으로 인해 승산이 없다. 밭작물은 조금 낫다. 과수는 종목을 잘 잡으면 해 볼만 하다. 사과나 배, 복숭아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초보자가 나무에 올라가 전정이나 적화를 제대로 하겠는가. 키위 농사를 짓는 이들은 키위가 부가가치가 높고 세계적인 과실이라며 적극 권한다. 그러나 키위도 만만치 않다. 기후와 습도 등 환경 제약이 크다. 초보자가 섣불리 덤벼들다가 큰 코 다친다.
만만하게 보는 게 양계이다. 양계는 초기 시설비가 많이 들고, 판로에 대한 위험 부담 그리고 자기 시간을 못 갖는다는 점에서 2순위로 밀린다. 소는 덩치가 큰 가축이라 소시민적으로 살아온 도시인들은 지례 겁을 먹는다.
콩 팥 수수 등 잡곡류는 수도작 보다 수익이 높고 농사짓는데 큰 기술도 필요 없다. 잡곡은 귀농인들 사이에 인기 종목 중 하나이다. 깻잎 상추 케일 브로콜리 등 채소 종류도 적극 관심을 가질 만하다. 미나리도 그렇다.
그렇다면 고사리는 어떤가. 고사리도 농사를 짓나? 고사리는 산에서 캐는 게 아닌가? 그런 선입관들로 관심 밖의 작목이다. 그 런데 이 고사리가 꽤 괜찮다고 한다. 고사리는 10명이 시작하면 한두 명만 살아남는다. 그런데 일단 자리를 잡으면 10명 중 8,9명이 남는다고 한다. 그만큼 안정적이라는 뜻이다. 처음에 떨어져 나가는 건 수익이 금방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8 년 전 전북 순창으로 귀농해 고사리 농사를 짓고 있는 김보성 씨(45)는 고사리로 인해 경제적 여유도 되찾고, 시골 생활의 여유도 즐기는 등 성공적인 귀농인의 하나이다. 김씨는 순창 팔덕면 덕창리에 있는 장인의 문중 소유의 산 6,000평을 개간해 고사리를 심었다. 물론 그는 한 번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다.
김씨는 고사리란 작목을 어떻게 선택하게 됐고, 농사는 또 어떻게 배워서 지었을까. 2006년 1월, 공기가 냉랭한 어느 날, 호남고속도로 순창IC를 나와 우회전 해 시내로 들어갔다. 수십 년 만의 폭설이 산과 밭, 지붕, 거리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한 커피숍에서 김보성 씨를 만났다. 방금 목욕을 하고 나왔다는 김씨는 얼굴에 윤기가 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작년 고사리 농사는 어땠나요?
“괜찮았어요. 그리 많지는 않지만요.”
김 씨는 작년 한 해 약 1,5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김씨의 밭은 6천 평. 그 정도 규모의 밭이면 수익이 6천만 원 이상 나와야 한다고. 초기 단계에다가 관리를 못해 적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확량은 늘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고사리는 번식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농사 첫 해엔 50만 원이 고작이었다. 기존의 산에 있던 것들을 캐다 팔은 것이다. 김씨는 99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2001년에 250만 원, 2002년 800만 원... 2003년에 1천만 원...고사리가 번식하듯 수익이 늘어나고 있다.
고사리는 뿌리로 심는다. 산에서 채취해 심기도 하고 사서 심기도 한다. 고사리 뿌리는 2~3m나 된다. 그걸 다 심는 게 아니다. 자세히 보면 눈이 있다. 땅 밑 뿌리 30~40cm 위치에 버들강아지처럼 생겼다. 눈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5~15cm 절단해 소독한 후 정식한다. 70cm 간격으로 심는다. 볏짚을 덮어주고 풀을 없애주면 순이 솟아오른다.
3월 중순에 심으면 7월에 순이 삐리 삐리 올라온다. 아래서는 뿌리가 급속히 뻗어나간다. 개체수가 늘어난다. 가을이 되면 잎사귀가 진다. 누렇게 변한다. 첫해는 그대로 둔다. 이듬해 그 자리에서 새순이 나온다.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3년 째 수확한다.
고사리 뿌리를 사서 심을 경우 호주산이 아닌지 잘 봐야 한다고. 국내에서 사방공사 하면서 호주로부터 잔디를 사다 심은 적이 있다. 그때 고사리가 묻어왔다는 말이 있다. 호주고사리는 그럴싸해 사람들이 캐다가 잔뜩 번식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맛이 없어 상인들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그때 호주고사리들이 강원도 쪽으로 모두 갔어요. 그걸 다 없애려면 3년 정도 걸릴 겁니다.”
고 사리도 제초가 힘들다. 소량으로 하면 몰라도 김씨 정도의 밭이면 기계로 해야 한다. 김씨는 인력 부족으로 관리를 못하고 있다. 혼자서 하기 때문이다. 수확 철에는 아르바이트를 썼다. 작년에 4명을 썼다. 인건비도 올랐고 그나마 사람이 없어 일당 3만 원 주고도 구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김씨의 고사리밭은 나무가 가득 들어찬 산이었다. 나무를 없애고 밭으로 만들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3개월간 엔진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뿌리 캐고 했다. 혼자서 그 모든 걸 다했다. 당시는 고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는 다시 하라면 못할 것이라고.
스프링클러 시설을 하는 등 돈도 계속 들어갔다. 알게 모르게 3천만 원 이나 들어갔다. 김씨는 물론 보조를 받지 않았지만 처음 시작하는 귀농인의 경우, 3천 평 이상 되면 면사무소 단위의 산림조합에서 50% 보조를 해준다고 한다.
“고사리 농사는 인내력의 싸움이에요. 어느 정도 돈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 3년 간 돈만 들어가고 수확은 없습니다. 그동안 버틸 여력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열 명이 시작하면 여덟, 아홉은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나 일단 굴러가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1천만 원은 나온다. 물론 풀 뽑고 수확 정도의 노동은 해야 한다. 부부가 하기에 적당한 고사리 밭 평수는 3천 평 이내다. 그보다 크면 관리를 못한다고.
고 사리는 4월 중순부터 7월 초순 사이에 수확한다. 수확한 고사리는 자연광에서 하루 정도 말린다. 상품화할 때는 상인이 원하는 형태로 포장한다. 시장에 나온 젖은 상태의 고사리는 건조한 것을 물에 다시 불린 것이다. 김씨의 고사리는 전량 서울의 나물만 유통하는 유기농매장 웰팝넷에 나간다. 요즘은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그러나 처음엔 유통도 힘들었다. 김씨도 고사리를 트럭에 싣고 사방을 뛰어다녔다. 롯데마트 경동시장 이천 등지의 영업팀장들을 만나 가격 상담을 했다. 국내산 도라지는 중국산에 비하면 거의 금값이다. 중국산은 1kg 당 1만 원 이하이다. 유기농 재배인 김씨의 도라지는 6만 원을 받는다.
관행으로 생산한 도라지는 유기농 재배처럼 높은 가격을 받지 못한다. 풀을 뽑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산에다 제초제를 뿌려서 키운 고사리는 가격 면에서 비교가 안된다.
순창에는 고사리농가가 약 40가구가 있다. 고사리 작목반 회원이 19명이다. 이들은 모두 무농약 품질인증을 받았다. 김씨는 작목반 총무 일을 보고 있다.
김 씨는 자연농업으로 고사리를 키운다. 동물 아미노산을 만들고, 한방영양제, 천연칼슘, 미네랄, 아카시아천혜녹즙 등 자연농업 천연자재를 손수 만들어 스프링클러로 밭에 뿌려주곤 한다. 토착미생물을 확대 배양해서 뿌리고 싶지만 배양 기계 값이 만만치 않다.
김씨는 고사리 외에 벼와 콩 농사도 지었다. 벼는 “다마금”이라는 종자이다. 옛날에는 흔했지만 요즘은 귀한 종자라고. 정읍에서 농사짓는 이로부터 어렵게 구했다. 원래 만주에서 들어온 씨이다. 기르기가 힘들기 때문에 농업기술센터에서도 만류했다. 키가 사람 키만큼 자라 그대로 두면 쓰러진다. 대신 미질이 최고다. 값도 비싸다. 한 가마에 1백만 원이나 한다고. 김씨는 작년에 9가마를 수확했다.
김씨는 여느 집 보다 훨씬 많은 콩을 수확했다. 농사 경험에 비추어보면 놀라운 양이라고 한다. 고추농사도 예외는 아니다. 고추가 실하게 열렸다. 고추는 무농약으로 작년에 300근 정도를 생산했다. 향신료로 쓰는 제피 농사도 지었다. 김씨가 손을 대는 것마다 수확량이 평균을 넘자 주변에서 김씨를 두고 “박사농부”라고 까지 부를 정도이다.
“비결이요? 그런 거 없어요. 땅이 스스로 알아서 해준 거지요.”
김 보성 씨는 강원도 철원 출신이다. 엉뚱한 면이 있는 그는 남다른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혼자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배를 타고 인도양으로 나갔다. 글 쓰는 것도 좋아했다. 그는 천주교 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친구들 중 상당수가 신부들이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자 명문가이다. 그의 아버지는 대구상고를 나온 인텔리로 은행가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공직생활을 했다. 그는 어릴 적, 김지하 같은 사회 인사들이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러 그의 집을 찾아온 걸 기억하고 있다. 김씨의 형은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앞장 선 신부 가운데 한 명이며, 누나 둘은 명문대를 수석 졸업한 재원이다.
김씨는 “가족 얘기는 공개하고 싶지 않아요”라면서 더 이상의 언급은 피했다. 김씨는 철원에서 소규모 실내 인테리어숍을 했다. 어느 날 한 고객의 집에 가서 일을 해주게 됐다. 군인의 집이었다. 그 시간에 마침 군인의 처제가 놀러왔다. 당시 처제는 서울의 한 전자업체에 근무하고 있었다. 김씨는 처제와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었다. 그 처제가 현재 김씨의 아내 이명숙 씨(40)이다.
김 씨는 결혼 후 철원에서 인테리어 일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동서(군인)가 대전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당시 서울 등지에 있던 군 시설물들이 대전의 신성동이라는 곳으로 옮겨 갔다. 인구도 늘고 일자리도 많아졌다. 김씨는 동서의 권유로 대전으로 내려갔다. 김씨 부부는 그곳에서 이불 대리점을 열었다.
그러나 IMF가 들이닥쳤다. 장사가 신통치 않았다. 가게세가 한 달에 2백만 원씩 꼬박꼬박 나갔다. 보증금을 모두 까먹고 권리금도 한 푼 못 건지고 가게를 정리했다. 무일푼이 된 김씨 부부는 갈 곳이 없었다. 김씨의 아내는 순창이 고향이다. 고향에 부모가 살고 있었다. 이씨는 친정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김씨는 순창으로 들어온 것이다. 1998년의 일이다.
“내려와서 처음엔 농사는 엄두도 못 냈어요. 가만히 보니 사람들이 뭔가 심고 캐고 하더군요. 나도 뭔가 심어놓고 정기적으로 할 게 뭐가 없나 찾아보았습니다.”
김 씨는 공공근로를 나갔다. 그 곳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에게서 고사리를 알게 됐다. 관심이 갔다. 아주머니의 사위가 하는 고사리농장도 가보았다. 막상 농장을 보고는 할 엄두가 나지 않아 또 며칠을 보냈다. 김씨는 처가 쪽 땅에다 시험 삼아 이 것 저 것 심어보았다. 작물이 크고 수확을 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김씨는 고사리를 본격적으로 키워보고 싶었다. 고사리를 캐다 심어보고, 잘라서 심기도 하고, 접목도 해보고 했다. 그런데 고사리를 키우는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곳이 없어 답답했다. 김씨가 알아본 바로는 관련 자료도 거의 없었다. 농사를 짓고 있는 농가들은 의외로 농사 기술을 공개하지 않았다.
“혼자서 책도 보고, 농가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강원도 평창에 재배하는 데가 조금 있어 그곳에 가서 보기도 했습니다. 어느 분이 12,000평에다 고사리 농사를 지어요. 그 분도 우연히 시작했답니다. 산에 염소를 키웠는데 염소가 고사리하고 철쭉을 못 먹어요. 염소들이 안 먹으니까 고사리 천지가 됐답니다.”
김씨는 농사를 지어보니 재밌다고 한다. 다시 도시로 나갈 생각은 없다.
“농사란 게 재밌어요. 내손으로 건강한 먹거리를 지어 먹는 게 최고의 보람이지요. 도시에서는 위가 나빠서 고생했는데 그런 게 없어졌어요.”
김 씨가 고질병을 고친 데에는 순창의 맑은 공기와 물도 한몫을 했을 것이라고 한다. 순창은 예부터 낮과 밤의 기온 차가 높고, 물과 공기가 좋아, 채소 작물이 잘 되는 지역이라고 한다. 순창에서 나오는 채소는 향이 좋고 맛도 좋다고 한다. 김씨의 농작물은 첫해부터 우수 농상품으로 선정되어 서울 양재동에 있는 농수산유통센터에 전시되기도 했다고.
도시에서 귀농하겠다는 이들이 가끔 김씨의 농장을 찾아온다. 김씨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치민다.
“그 사람들이 와서는, 나는 욕심 없이 연봉 2,000만 원의 수익을 올리고 싶다고 그래요. 나도 힘들게 합니다. 적은 돈이 아니지요. 돈 벌려면 노가다 하지 왜 시골에 들어오는지 모르겠어요.”
김 씨에 따르면 빈손으로 들어와도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시골이다. 욕심만 버리면 산다는 것이다. 자신도 돈 생각했다면 일찌감치 떠났을 것이란다. 자기가 먹고 남은 거 팔면 기회도 생기고 돈도 생긴다고. 김씨는 사람들이 그런 마음으로 시골에 들어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씨는 물론 아내도 시골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부부 모두 도시의 문화를 그리워할 나이도 지났다. 김씨는 도시에 대한 향수도 조금 남아 있지만 정작 도시로 나가보면 머리가 아프다. 이명숙 씨는 요리솜씨가 좋다. 전남 고창에서 열린 음식축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씨는 요리 강사 자격을 따기 위해 전남대에서 공부 중이다. 이씨는 인건비를 받고 올해 생협의 김장을 대신 해주었다.
김씨 부부는 교육비와 차량 유지비 외에는 특별히 들어갈 데가 없다. 김씨는 두 딸(중1, 초 4년)을 두었다. 교육비는 한 달에 30여만 원. 그가 사는 순창 적성면 석산리 집에서 밭까지는 거리가 멀다. 30km이다. 기름 값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김씨는 농사를 짓지 않는 겨울에도 쉬지 않는다. 강에서 다슬기 채취를 하고 처남의 조경일도 거든다.
김보성 씨는 인터뷰 말미에 자신의 귀농 경험을 바탕으로 도시 귀농인에게 몇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첫째, 시골에서 땅 먼저 살 생각하지 마라.
시골에는 널린 게 땅이다. 임대를 하라. 임대료도 저렴하다. 농사를 배운 후 자신 있고 안정되고 뿌리 내린 후 구입해도 늦지 않다. 물론 소규모로 시작해야 한다.
두 번째, 상황 판단을 먼저 해라.
예를 들어 고추 가격이 올해 비싸다, 그러면 내년에는 하락이다. 감자가 바닥세라고 하자. 그러면 감자를 심으면 된다.
세 번째, 환상을 버려라.
인건비가 많이 드는 작물은 안 된다. 부부의 노동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것이 좋다. 잘못하면 씨앗 값도 못 건진다.
마지막으로 축산의 경우, 그 동물에 대해 박사가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걸린다. 판로도 중요하다. 그런 점들이 해결된다면 해도 좋다.
“농사도 돈이 있어야 합니다. 시골에 들어가 몇 년간은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이 있어야 해요. 저 같은 경우는 처가 덕을 많이 본 셈입니다.”
김보성 씨의 올해 계획은 고사리 농사을 더 짓고, 하루빨리 집을 지어 처가에서 나오는 일이라고 말했다.
순창에서 고사리농사를 짓는 김보성 이명숙 씨 부부. |
대 도시에서 자영업을 하다 실패하고 맨손으로 처가의 고향으로 들어간 김보성 씨. 그는 8년 만에 고사리농사로 생활의 안정을 되찾고 건강도 좋아졌다. 고사리를 선택한 이유, 고사리농사를 지으며 땀 흘린 과정, 남다른 소득의 비결 등을 들어보았다.
귀 농의 가장 큰 현안은 무얼 먹고 사는가 하는 문제이다. 농사 경험이 전무한 50~60대의 도시 귀농인이 실제로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건 무리다. 퇴직금, 연금 등의 여유가 있는 그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귀농보다는 전원생활이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시골에서 여생을 편안하게 지내자는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러나 30~40대는 사정이 다르다. 젊은 그들은 상대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다. 당장 뭔가를 해서 수익을 내야 한다. 그렇다면 길은 뻔하다. 농사다. 물론 시골서 운전도 할 수 있고 음식점도 할 수 있지만 그런 걸 하려고 구태여 시골까지 찾아들어갈 이유가 없다. 결국 농사이다. 논. 밭농사나 축산, 과수 아니면 버섯 같은 특용작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벼농사는 수입개방으로 인해 승산이 없다. 밭작물은 조금 낫다. 과수는 종목을 잘 잡으면 해 볼만 하다. 사과나 배, 복숭아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초보자가 나무에 올라가 전정이나 적화를 제대로 하겠는가. 키위 농사를 짓는 이들은 키위가 부가가치가 높고 세계적인 과실이라며 적극 권한다. 그러나 키위도 만만치 않다. 기후와 습도 등 환경 제약이 크다. 초보자가 섣불리 덤벼들다가 큰 코 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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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하게 보는 게 양계이다. 양계는 초기 시설비가 많이 들고, 판로에 대한 위험 부담 그리고 자기 시간을 못 갖는다는 점에서 2순위로 밀린다. 소는 덩치가 큰 가축이라 소시민적으로 살아온 도시인들은 지례 겁을 먹는다.
콩 팥 수수 등 잡곡류는 수도작 보다 수익이 높고 농사짓는데 큰 기술도 필요 없다. 잡곡은 귀농인들 사이에 인기 종목 중 하나이다. 깻잎 상추 케일 브로콜리 등 채소 종류도 적극 관심을 가질 만하다. 미나리도 그렇다.
그렇다면 고사리는 어떤가. 고사리도 농사를 짓나? 고사리는 산에서 캐는 게 아닌가? 그런 선입관들로 관심 밖의 작목이다. 그 런데 이 고사리가 꽤 괜찮다고 한다. 고사리는 10명이 시작하면 한두 명만 살아남는다. 그런데 일단 자리를 잡으면 10명 중 8,9명이 남는다고 한다. 그만큼 안정적이라는 뜻이다. 처음에 떨어져 나가는 건 수익이 금방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8 년 전 전북 순창으로 귀농해 고사리 농사를 짓고 있는 김보성 씨(45)는 고사리로 인해 경제적 여유도 되찾고, 시골 생활의 여유도 즐기는 등 성공적인 귀농인의 하나이다. 김씨는 순창 팔덕면 덕창리에 있는 장인의 문중 소유의 산 6,000평을 개간해 고사리를 심었다. 물론 그는 한 번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다.
김씨는 고사리란 작목을 어떻게 선택하게 됐고, 농사는 또 어떻게 배워서 지었을까. 2006년 1월, 공기가 냉랭한 어느 날, 호남고속도로 순창IC를 나와 우회전 해 시내로 들어갔다. 수십 년 만의 폭설이 산과 밭, 지붕, 거리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한 커피숍에서 김보성 씨를 만났다. 방금 목욕을 하고 나왔다는 김씨는 얼굴에 윤기가 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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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고사리 농사는 어땠나요?
“괜찮았어요. 그리 많지는 않지만요.”
김 씨는 작년 한 해 약 1,5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김씨의 밭은 6천 평. 그 정도 규모의 밭이면 수익이 6천만 원 이상 나와야 한다고. 초기 단계에다가 관리를 못해 적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확량은 늘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고사리는 번식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농사 첫 해엔 50만 원이 고작이었다. 기존의 산에 있던 것들을 캐다 팔은 것이다. 김씨는 99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2001년에 250만 원, 2002년 800만 원... 2003년에 1천만 원...고사리가 번식하듯 수익이 늘어나고 있다.
고사리는 뿌리로 심는다. 산에서 채취해 심기도 하고 사서 심기도 한다. 고사리 뿌리는 2~3m나 된다. 그걸 다 심는 게 아니다. 자세히 보면 눈이 있다. 땅 밑 뿌리 30~40cm 위치에 버들강아지처럼 생겼다. 눈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5~15cm 절단해 소독한 후 정식한다. 70cm 간격으로 심는다. 볏짚을 덮어주고 풀을 없애주면 순이 솟아오른다.
3월 중순에 심으면 7월에 순이 삐리 삐리 올라온다. 아래서는 뿌리가 급속히 뻗어나간다. 개체수가 늘어난다. 가을이 되면 잎사귀가 진다. 누렇게 변한다. 첫해는 그대로 둔다. 이듬해 그 자리에서 새순이 나온다.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3년 째 수확한다.
고사리 뿌리를 사서 심을 경우 호주산이 아닌지 잘 봐야 한다고. 국내에서 사방공사 하면서 호주로부터 잔디를 사다 심은 적이 있다. 그때 고사리가 묻어왔다는 말이 있다. 호주고사리는 그럴싸해 사람들이 캐다가 잔뜩 번식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맛이 없어 상인들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그때 호주고사리들이 강원도 쪽으로 모두 갔어요. 그걸 다 없애려면 3년 정도 걸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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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사리도 제초가 힘들다. 소량으로 하면 몰라도 김씨 정도의 밭이면 기계로 해야 한다. 김씨는 인력 부족으로 관리를 못하고 있다. 혼자서 하기 때문이다. 수확 철에는 아르바이트를 썼다. 작년에 4명을 썼다. 인건비도 올랐고 그나마 사람이 없어 일당 3만 원 주고도 구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김씨의 고사리밭은 나무가 가득 들어찬 산이었다. 나무를 없애고 밭으로 만들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3개월간 엔진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뿌리 캐고 했다. 혼자서 그 모든 걸 다했다. 당시는 고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는 다시 하라면 못할 것이라고.
스프링클러 시설을 하는 등 돈도 계속 들어갔다. 알게 모르게 3천만 원 이나 들어갔다. 김씨는 물론 보조를 받지 않았지만 처음 시작하는 귀농인의 경우, 3천 평 이상 되면 면사무소 단위의 산림조합에서 50% 보조를 해준다고 한다.
“고사리 농사는 인내력의 싸움이에요. 어느 정도 돈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 3년 간 돈만 들어가고 수확은 없습니다. 그동안 버틸 여력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열 명이 시작하면 여덟, 아홉은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나 일단 굴러가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1천만 원은 나온다. 물론 풀 뽑고 수확 정도의 노동은 해야 한다. 부부가 하기에 적당한 고사리 밭 평수는 3천 평 이내다. 그보다 크면 관리를 못한다고.
고 사리는 4월 중순부터 7월 초순 사이에 수확한다. 수확한 고사리는 자연광에서 하루 정도 말린다. 상품화할 때는 상인이 원하는 형태로 포장한다. 시장에 나온 젖은 상태의 고사리는 건조한 것을 물에 다시 불린 것이다. 김씨의 고사리는 전량 서울의 나물만 유통하는 유기농매장 웰팝넷에 나간다. 요즘은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그러나 처음엔 유통도 힘들었다. 김씨도 고사리를 트럭에 싣고 사방을 뛰어다녔다. 롯데마트 경동시장 이천 등지의 영업팀장들을 만나 가격 상담을 했다. 국내산 도라지는 중국산에 비하면 거의 금값이다. 중국산은 1kg 당 1만 원 이하이다. 유기농 재배인 김씨의 도라지는 6만 원을 받는다.
관행으로 생산한 도라지는 유기농 재배처럼 높은 가격을 받지 못한다. 풀을 뽑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산에다 제초제를 뿌려서 키운 고사리는 가격 면에서 비교가 안된다.
순창에는 고사리농가가 약 40가구가 있다. 고사리 작목반 회원이 19명이다. 이들은 모두 무농약 품질인증을 받았다. 김씨는 작목반 총무 일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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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는 자연농업으로 고사리를 키운다. 동물 아미노산을 만들고, 한방영양제, 천연칼슘, 미네랄, 아카시아천혜녹즙 등 자연농업 천연자재를 손수 만들어 스프링클러로 밭에 뿌려주곤 한다. 토착미생물을 확대 배양해서 뿌리고 싶지만 배양 기계 값이 만만치 않다.
김씨는 고사리 외에 벼와 콩 농사도 지었다. 벼는 “다마금”이라는 종자이다. 옛날에는 흔했지만 요즘은 귀한 종자라고. 정읍에서 농사짓는 이로부터 어렵게 구했다. 원래 만주에서 들어온 씨이다. 기르기가 힘들기 때문에 농업기술센터에서도 만류했다. 키가 사람 키만큼 자라 그대로 두면 쓰러진다. 대신 미질이 최고다. 값도 비싸다. 한 가마에 1백만 원이나 한다고. 김씨는 작년에 9가마를 수확했다.
김씨는 여느 집 보다 훨씬 많은 콩을 수확했다. 농사 경험에 비추어보면 놀라운 양이라고 한다. 고추농사도 예외는 아니다. 고추가 실하게 열렸다. 고추는 무농약으로 작년에 300근 정도를 생산했다. 향신료로 쓰는 제피 농사도 지었다. 김씨가 손을 대는 것마다 수확량이 평균을 넘자 주변에서 김씨를 두고 “박사농부”라고 까지 부를 정도이다.
“비결이요? 그런 거 없어요. 땅이 스스로 알아서 해준 거지요.”
김 보성 씨는 강원도 철원 출신이다. 엉뚱한 면이 있는 그는 남다른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혼자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배를 타고 인도양으로 나갔다. 글 쓰는 것도 좋아했다. 그는 천주교 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친구들 중 상당수가 신부들이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자 명문가이다. 그의 아버지는 대구상고를 나온 인텔리로 은행가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공직생활을 했다. 그는 어릴 적, 김지하 같은 사회 인사들이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러 그의 집을 찾아온 걸 기억하고 있다. 김씨의 형은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앞장 선 신부 가운데 한 명이며, 누나 둘은 명문대를 수석 졸업한 재원이다.
김씨는 “가족 얘기는 공개하고 싶지 않아요”라면서 더 이상의 언급은 피했다. 김씨는 철원에서 소규모 실내 인테리어숍을 했다. 어느 날 한 고객의 집에 가서 일을 해주게 됐다. 군인의 집이었다. 그 시간에 마침 군인의 처제가 놀러왔다. 당시 처제는 서울의 한 전자업체에 근무하고 있었다. 김씨는 처제와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었다. 그 처제가 현재 김씨의 아내 이명숙 씨(4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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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는 결혼 후 철원에서 인테리어 일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동서(군인)가 대전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당시 서울 등지에 있던 군 시설물들이 대전의 신성동이라는 곳으로 옮겨 갔다. 인구도 늘고 일자리도 많아졌다. 김씨는 동서의 권유로 대전으로 내려갔다. 김씨 부부는 그곳에서 이불 대리점을 열었다.
그러나 IMF가 들이닥쳤다. 장사가 신통치 않았다. 가게세가 한 달에 2백만 원씩 꼬박꼬박 나갔다. 보증금을 모두 까먹고 권리금도 한 푼 못 건지고 가게를 정리했다. 무일푼이 된 김씨 부부는 갈 곳이 없었다. 김씨의 아내는 순창이 고향이다. 고향에 부모가 살고 있었다. 이씨는 친정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김씨는 순창으로 들어온 것이다. 1998년의 일이다.
“내려와서 처음엔 농사는 엄두도 못 냈어요. 가만히 보니 사람들이 뭔가 심고 캐고 하더군요. 나도 뭔가 심어놓고 정기적으로 할 게 뭐가 없나 찾아보았습니다.”
김 씨는 공공근로를 나갔다. 그 곳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에게서 고사리를 알게 됐다. 관심이 갔다. 아주머니의 사위가 하는 고사리농장도 가보았다. 막상 농장을 보고는 할 엄두가 나지 않아 또 며칠을 보냈다. 김씨는 처가 쪽 땅에다 시험 삼아 이 것 저 것 심어보았다. 작물이 크고 수확을 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김씨는 고사리를 본격적으로 키워보고 싶었다. 고사리를 캐다 심어보고, 잘라서 심기도 하고, 접목도 해보고 했다. 그런데 고사리를 키우는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곳이 없어 답답했다. 김씨가 알아본 바로는 관련 자료도 거의 없었다. 농사를 짓고 있는 농가들은 의외로 농사 기술을 공개하지 않았다.
“혼자서 책도 보고, 농가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강원도 평창에 재배하는 데가 조금 있어 그곳에 가서 보기도 했습니다. 어느 분이 12,000평에다 고사리 농사를 지어요. 그 분도 우연히 시작했답니다. 산에 염소를 키웠는데 염소가 고사리하고 철쭉을 못 먹어요. 염소들이 안 먹으니까 고사리 천지가 됐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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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농사를 지어보니 재밌다고 한다. 다시 도시로 나갈 생각은 없다.
“농사란 게 재밌어요. 내손으로 건강한 먹거리를 지어 먹는 게 최고의 보람이지요. 도시에서는 위가 나빠서 고생했는데 그런 게 없어졌어요.”
김 씨가 고질병을 고친 데에는 순창의 맑은 공기와 물도 한몫을 했을 것이라고 한다. 순창은 예부터 낮과 밤의 기온 차가 높고, 물과 공기가 좋아, 채소 작물이 잘 되는 지역이라고 한다. 순창에서 나오는 채소는 향이 좋고 맛도 좋다고 한다. 김씨의 농작물은 첫해부터 우수 농상품으로 선정되어 서울 양재동에 있는 농수산유통센터에 전시되기도 했다고.
도시에서 귀농하겠다는 이들이 가끔 김씨의 농장을 찾아온다. 김씨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치민다.
“그 사람들이 와서는, 나는 욕심 없이 연봉 2,000만 원의 수익을 올리고 싶다고 그래요. 나도 힘들게 합니다. 적은 돈이 아니지요. 돈 벌려면 노가다 하지 왜 시골에 들어오는지 모르겠어요.”
김 씨에 따르면 빈손으로 들어와도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시골이다. 욕심만 버리면 산다는 것이다. 자신도 돈 생각했다면 일찌감치 떠났을 것이란다. 자기가 먹고 남은 거 팔면 기회도 생기고 돈도 생긴다고. 김씨는 사람들이 그런 마음으로 시골에 들어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씨는 물론 아내도 시골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부부 모두 도시의 문화를 그리워할 나이도 지났다. 김씨는 도시에 대한 향수도 조금 남아 있지만 정작 도시로 나가보면 머리가 아프다. 이명숙 씨는 요리솜씨가 좋다. 전남 고창에서 열린 음식축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씨는 요리 강사 자격을 따기 위해 전남대에서 공부 중이다. 이씨는 인건비를 받고 올해 생협의 김장을 대신 해주었다.
김씨 부부는 교육비와 차량 유지비 외에는 특별히 들어갈 데가 없다. 김씨는 두 딸(중1, 초 4년)을 두었다. 교육비는 한 달에 30여만 원. 그가 사는 순창 적성면 석산리 집에서 밭까지는 거리가 멀다. 30km이다. 기름 값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김씨는 농사를 짓지 않는 겨울에도 쉬지 않는다. 강에서 다슬기 채취를 하고 처남의 조경일도 거든다.
김보성 씨는 인터뷰 말미에 자신의 귀농 경험을 바탕으로 도시 귀농인에게 몇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첫째, 시골에서 땅 먼저 살 생각하지 마라.
시골에는 널린 게 땅이다. 임대를 하라. 임대료도 저렴하다. 농사를 배운 후 자신 있고 안정되고 뿌리 내린 후 구입해도 늦지 않다. 물론 소규모로 시작해야 한다.
두 번째, 상황 판단을 먼저 해라.
예를 들어 고추 가격이 올해 비싸다, 그러면 내년에는 하락이다. 감자가 바닥세라고 하자. 그러면 감자를 심으면 된다.
세 번째, 환상을 버려라.
인건비가 많이 드는 작물은 안 된다. 부부의 노동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것이 좋다. 잘못하면 씨앗 값도 못 건진다.
마지막으로 축산의 경우, 그 동물에 대해 박사가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걸린다. 판로도 중요하다. 그런 점들이 해결된다면 해도 좋다.
“농사도 돈이 있어야 합니다. 시골에 들어가 몇 년간은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이 있어야 해요. 저 같은 경우는 처가 덕을 많이 본 셈입니다.”
김보성 씨의 올해 계획은 고사리 농사을 더 짓고, 하루빨리 집을 지어 처가에서 나오는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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