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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아버지는 왜 '동물의 왕국'을 좋아할까? - 주시청자층 40~50대 남성

▲KBS에서 방영 중인 <동물의 왕국> ©뉴스미션

언제 봐도 한결같은 친구가 있다. 쉬이 유행을 따르지도 섣부른 변화를 시도하지도 않는 그 친구는, 마치 남과는 다른 시간의 축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듯 늘 유유자적이다. 그리고 그 한결같음으로 인해, 오히려 그는 어느 인기인 친구보다 더욱 독보적인 존재로 기억되기도 한다.

TV프로그램 중에도 그런 한결같음을 자랑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KBS에서 십 수년째 방영되고 있는 <동물의 왕국>이다. <동물의 왕국>에는 그 흔한 연예인 한 명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늘 한결같이 사자와 물소 떼가 나오고, 그리고 늘 한결같이 이들의 모습을 마치 국민체조 일러주는 체육 선생님처럼 조곤조곤 설명해주는 성우가 등장할 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 한결같은 프로그램이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방영될 수 있었을까. 최장수 프로그램이었던 ‘전원일기’도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마당에 말이다.

<동물의 왕국>을 사랑하는 주시청자층, 40~50대 남성

한 프로그램이 그처럼 오래 세월동안 방영되었다는 것은, 결국 그에 준하는 시청자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다는 사실의 반증이 된다. <동물의 왕국>의 수요의 중심에는 중장년층, 즉 40대 이상의 연령층이라는 막강한 주시청자층이 존재하고 있다.

참으로 신기하다. 왜 유독 중장년층일까. 이에 덧붙이는 <동물의 왕국> 관계자의 말은 더욱 흥미롭다. 중장년 여성보다 중장년 남성의 시청률이 높으며, 포유류가 방영될 때의 시청률이 곤충이나 어류의 그것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즉 이를 종합해보면, TV 속 포유동물들의 생존경쟁을 가장 즐겨보는 시청자들이 다름 아닌 우리의 아버지들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러고 보니 늘 그랬던 것 같다. <동물의 왕국> 방송시간이 되면 어느 샌가 TV 앞에 앉아있던 사람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결국 사자의 사냥 장면에 눈길을 두던 사람도, 그리고 이따금 반복되던 내용들을 매번 재미있게 보던 사람도, 모두 아버지였다.

혹시 나의 아버지만 그러했던 것은 아닐까. 또 다른 아버지에게 <동물의 왕국>에 대해 묻는다. “재밌잖아, 사자가 사슴 잡아먹고 그러는 거 보면. 어쩌면 우리 사는 거랑 그렇게 비슷한지.” 매주 거르지 않고 <동물의 왕국>을 챙겨본다는 어느 아버지, 윤창배(53세, 자영업)씨의 말이다.

아버지들이 <동물의 왕국>을 즐겨보는 이유

이쯤 되자 궁금증이 극에 달한다. 왜 아버지들은 <동물의 왕국>을 즐겨보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 중에서도 유독 포유동물에 집중하는 것일까.

콘라트 로렌츠는 ‘공격성’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인간의 공격 충동은 수천 년 전 인류가 살게 된 첫날부터 특별한 도태의 과정을 통해 발생했다고 본다. 인류는 무기와 의복, 사회조직 등을 통해 외부의 위협인 아사(餓死)와 동사(凍死), 맹수에 의해 잡아먹힐 위험 등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이는 곧 더 이상 본질적인 도태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때 인류 상호간의 특별한 도태의 형식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니, 이 도태를 추진한 요소가 바로 전쟁이라는 것이다.

성신여대 심리학과 홍대식 교수는, 이처럼 우리 안에 내재된 공격성이 적나라하게 발현된 현장이 바로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이라고 정의한다. 곤충이 잎사귀를 갉아먹는 장면보다 사자가 먹잇감을 발톱으로 내리쳐 죽이는 장면이 더욱 흥분감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격성의 측면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중년 남성들의 <동물의 왕국> 시청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따라서 이를 인간 본연의 공격성향에 ‘남성은 강해야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더해진, 하나의 사회적 결과물로서 조망하는 편이 보다 적절하다고 하겠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사회화 학습의 결과?

▲지금의 아버지 세대는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사회화 과정을 거쳐왔다. ©뉴스미션

아버지 세대에게 있어 ‘눈물’은 철저히 금기시된 정서의 표현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동정심이나 예민함 등 소위 ‘연약한 감정’은 곧 열등감으로 치부되었으며, 따라서 이를 마음속 깊이 꽁꽁 감추며 성장했다. “남자가 눈물을..” 이라든지 “계집애 같이 수줍어하긴” 등의 말은 분노ㆍ공포ㆍ슬픔 따위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을 ‘남성적이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이러한 정서적 측면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기제로서 작용했다.

이러한 남성의 사회화는 1970년대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 또 다른 맥락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 근대화라는 것은 철저히 국가주의적 군사화의 맥락에서 진행되었으며, 당시 남성적 이상형으로는 ‘이순신’이 선택되어 대중적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군대는 바로 이러한 사회 전반에 걸친 군사문화를 꽃피우게 한 온상이었다. 즉 철저한 계급구조와 명령ㆍ 복종의 논리를 개개의 남성들에게 효율적으로 체화시킴으로써, △강자 중심의 힘의 논리 △물리적 힘을 통한 해결 △정복논리 등을 전형적인 남성적 가치로 강화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성장 제일’이라는 기치를 내걸다시피 한 정부의 경제성장 추구 정책은, ‘남성다움’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한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효율성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적 논리는 가장인 남성에게 직장에서의 성공을 곧 인생의 성공으로 여기게끔 만들었으며, 안정된 직장을 가진 남성만이 가정에서도 훌륭한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을 조장하는 구실을 했다.

이와 같이 남성이 가족의 생계를 담당하는 부양자이며 대표자라는 고정관념은, 남성들로 하여금 가족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강인해야 하며 ‘울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심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남성들은 이같은 현실에 대해 구속감을 느끼면서도, 오랫동안 그들에게 기대되고 수행되어 왔던 관습을 깨뜨리지 못했다. 결국 사회적 규범이 역할을 구속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아버지들은 <동물의 왕국>을 보며 ‘자유’를 누린다

이처럼 아버지 세대는 ‘남성다움’의 사회화 과정을 통해, 정서 표현의 억제를 뼛속 깊이 체득해 온 세대라 할 수 있다. 다시 <동물의 왕국>으로 돌아 가보자. 아버지 세대가 <동물의 왕국>에 애착을 보이는 것은, 거꾸로 이들이 볼 만한 TV 프로그램이 부재한다는 말로도 풀이될 수 있다. 세밀한 심리묘사를 다루는 드라마 장르는 애당초 이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 웃고 떠드는 오락프로그램의 경우도 어색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그나마 이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사극이다. 강자와 약자의 대립이 여느 장르에 비해 뚜렷한 사극은, 그 익숙한 구도로 하여금 중장년의 남성 시청자층에게 많은 호응을 이끌어낸다. 사극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강자’이며, 경쟁에서 패한 ‘약자’는 군말 없이 ‘패자의 뺏지’를 달게 되는 것이 원칙이다.

<동물의 왕국>에는 이같은 ‘강자의 논리’가 사자와 물소의 투쟁으로 환유되어 살아 숨쉰다. 이는 곧 숨가쁘게 진행되어 온 우리 사회의 경쟁논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강해야 살아남는다 ’는 논리는 이미 아버지 세대에게는 너무나 자명하며, 따라서 익숙한 논리다. 그리하여 고단한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투영된 <동물의 왕국>은, 결국 아버지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축소판으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현실에서 늘 ‘약자’일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TV 속 <동물의 왕국>에서 때로는 ‘포식자’가 때로는 ‘피식자’가 되어 야생 초원 곳곳을 누빈다. 그리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평소에는 드러낼 수 없었던 ‘수컷 포유동물’로서의 비애를 한껏 만끽한다. 이것은 즉 그들이 잠시나마 주위로부터 강요된 ‘강해야 함’의 짐을 내려놓고, ‘약해져도 좋음’의 면죄부를 선사받는 ‘자유’의 과정이다. 또한 이는 동시에, 스스로 존재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보듬는 ‘자위’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때 <동물의 왕국>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포유동물들의 삶의 궤적을 간직한, 원형 그대로의 공간이 된다.

각박한 ‘남성다움’의 현실 속에서, 오늘도 우리의 아버지들은 TV 속 <동물의 왕국>에 빠져든다. 찰나의 순간이 가져다주는, 건전하고 합법적인 방식의 자유를 기도하며. 또한 가끔은 물소 떼의 연대가 사자의 공격을 막아내는 통쾌한 역전극을 꿈꾸기도 하면서 말이다.
[뉴스미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