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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명성황후 - 역사왜곡

■이태진 교수가 말하는 ‘날조의 계보’ 권력욕에 나라 망친 여인으로 그린 뒤 후대 역사소설은 그대로 옮겨 “시해 가담한 일본 저널리스트가 ‘대원군 전기’서 이미지 첫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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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시아버지 ‘대원군’과 며느리 ‘민비(명성황후)’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싸움,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우왕좌왕하는 나약한 임금 ‘고종’이라는 3자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상황이다. ‘민비’는 오랫동안 ‘권력욕에 불탄 나머지 나라를 망하게 한 여인’으로까지 인식됐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반영한 것일까?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인문대학장)는 최근 출간된 반년간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일조각)에 기고한 논문 ‘역사소설 속의 명성황후 이미지’에서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계보를 추적했다. 그 결과 ‘대원군―민비―고종’의 3자관계를 처음으로 제시한 책은 일본의 저널리스트 기쿠치 겐조(菊池謙讓)가 1910년 10월에 발표한 ‘조선최근외교사 대원군전’이었다.

놀라 운 사실은 기쿠치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직접 가담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 교수는 “이 책은 기쿠치가 왕비 시해 만행을 저지른 것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라고 평가했다. 끝없이 권력에 도전한 ‘민비’를 대원군이 제거하려 했으며 일본인은 이를 도왔을 뿐이라는 논지다. 기쿠치는 이를 위해 대원군을 공전(空前)의 업적을 세운 ‘건설적 영웅’으로, ‘민비’는 그 업적을 망친 ‘파괴적 영웅’으로 설정한 뒤 두 사람 사이의 대립구도를 왜곡 강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쿠치의 책은 수많은 허구로 가득 차 있다. 대원군이 궁인 이씨 소생의 왕자 이선을 세자로 책봉하려 해 왕비로부터 반발을 샀다는 부분이 대표적인데, 이 교수는 “왕비가 20세도 되지 않았는데 궁인 소생을 원자로 책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밖에 최익현이 왕비의 지시에 따라 대원군 탄핵 상소를 올렸다는 부분 등도 모두 허구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처럼 왜곡된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이후 장도빈의 역사서 ‘명성황후와 대원군’(1927), 호소이 하지메(細井肇)의 다큐멘터리 소설 ‘여왕 민비’(1931)로 계승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기쿠치의 ‘대원군전’을 기본 텍스트로 삼은 대표적인 국내 역사소설이 정비석의 ‘민비’(1981)라고 말했다. 이 소설은 한술 더 떠 명성황후를 포악하고 음탕한 인물로 묘사했을 뿐 아니라 조선의 외교를 더욱 굴종적으로 그릴 정도의 파탄적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TV 드라마 ‘명성황후’(2001~2002)의 줄거리도 이 소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현재 시중에 나도는 수많은 청소년용 만화의 텍스트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그는 “국민의 바른 역사의식 확립을 위해 이 소설은 독서계로부터 폐기 처분 선고를 받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인문대학장), '나라를 망친 권력욕의 화신 민비'라는 명성황후의 왜곡된 이미지가 어디서부터 유래됐는지 추적했다.


그 이미지는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일본 언론인 기쿠치 겐조의 1910년작 <대원군전>에서 비롯됐으며, 1980년 정비석 소설 <민비>에서 확대돼 지금의 드라마와 만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