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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영어를 잘 하면 정말 부자가 될까

인수위의 영어 정책이 연일 화제다.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영어를 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영어만 잘하면 정말 선진국이 되는 걸까. 그럼 대통령부터 미국인을 뽑던지.

거대한 농담의 시대다.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차기 정권인데, 어째 농담만큼은 늘 운하급이다. 국민들은 거의 매일마다 새로 추가된 인수위의 농담과 싸워야 한다. 인수위발 최신 농담은 이명박 당선자가 숭례문 복원을 위한 국민 모금을 제안한 뒤 여론의 역풍을 얻어맞은 데 대해 “당선인의 본의가 제대로 전달 안 돼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고 변론한 것이다(물론 그간 농담이 더 늘었지만, 이 원고를 쓸 시점의 '최신'은 그랬답니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그 깊고 너른 사람의 진심을 오독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런데 당선자와 인수위의 말을 접할 때만 유독 난청난독증이 심화되는 이유는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해가 있었다는 이 말은 향후 5년 동안 지겹도록 듣게 될 공산이 커 보인다. 이름을 실용정부 대신 오해정부로 고치면 그나마 유머 감각이라도 증명하는 셈일 텐데, 아쉽게도 당선자와 인수위원장이 외모만큼 재치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농이 짙고 두텁기로 으뜸이라면 역시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을 빼놓을 수 없다. 그 폐해가 불 보듯 빤해 재미로 웃어넘기기 힘들다.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은 지난 1월 22일 대입 자율화 로드맵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영어교육 하나만 제대로 하면 사교육비를 상당부분 줄일 수 있다”면서 정규교육 과정 아래 모든 수업을 영어로 실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영어몰입(沒入)교육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틀 후에는 일단 농어촌 지역학교를 대상으로 시범 실시할 것이라며 입장을 구체화했다. 학생들의 이해도가 저하될 수 있는 과목보다는 수학이나 과학, 예체능 같은 수업부터 단계적으로 적용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이유가 가상한데, 무려 도시 농촌 사이 영어교육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란다. 첫 번째 질문. 양극화는 무엇 때문에 생기는가?

여론은 연일 악화일로였다. 인수위는 30일 영어 공교육 관련 공청회를 감행했다. 주위의 의견을 널리 듣겠다는 취지였다. 토론자는 교수 5명, 교장 2명, 교사 1명, 장학사 1명, 학부모 1명.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인수위 측에서 추천한 인사, 즉 찬성론자였다. 반대의견을 내는 단체나 일반 시민은 참석할 수 없었다. 밀실 공청회였다. 여기서 인수위는 대대적인 영어공교육 개혁안을 발표했다. 오는 2013년까지 2만 3천 명의 ‘영어 전용 교사’를 채용하고 초등학교 영어 수업시간을 지금의 주당 1시간에서 3시간으로 확대하며, 2013학년도 대학 입시부터는 국가 영어능력평가 시험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향후 5년 동안 4조원을 투입하겠다는 구상이다. 공청회 끝에 이경숙 위원장은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이 획기적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얼마 전 ‘프레스 프렌들리(언론친화적)’라는 말을 썼더니 언론에서 모두 ‘프렌들리’라고 썼던데, 'F'발음이므로 ‘후렌들리’가 맞다. (중략) ‘오렌지’가 아니라 ‘어륀지’”라고 강조했다. 두 번째 질문. 초콜릿이 춰컬릿이 되면 정말 ‘개선’되는 걸까?

다음 날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이례적으로 인수위 간사단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 인사는 ‘굿모닝’ ‘하우아유’였다. 당선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수위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잘하고 있습니다. 반대와 저항은 으레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모두 국가 미래를 위해서 머리 맞대고 해야 되는 것이지 이것을 반대하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든든한 사수다. 사실 영어몰입교육을 향한 인수위의 강력한 의지는 당선자의 공약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기러기 아빠(를 줄이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영어 공교육을 강화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건 바 있다. 해외 원정 유학을 막기 위해 모든 학생이, 나아가 모든 국민이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세 번째 질문. 기러기 아빠는 왜 생기는가?

세 가지 질문은 모두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다. 남들보다 더 잘 살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이익을 소유하겠다는 사적 이기심이 사회 구조적 문제와 만나 양극화를 만들고, 개선 개발을 향한 끝없는 의지에 동기를 부여하고, 기러기 아빠를 양산한다. 인수위와 이명박 차기 정부의 병증이 여기 있다. 이들은 모두가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공공의 이익을 실현함으로써 개인의 사적 욕망을 충족시켜주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거짓말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기러기 아빠는 자기 자식이 남들보다 영어를 더 잘 하게 하고 싶은 것이지, 결코 모두가 영어를 잘 하는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게 아니다. 모두가 영어를 잘 하게 돼서 사교육 시장이 안정화되고 가정에 평화가 찾아온다면 그야말로 나는 새가 용이다. 일단 영어 수업을 따라잡을 수 없는 아이들은 도태될 것이고, 따라잡는 아이들 중에서도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며, 결국 이 광기 어린 시험 제도 안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내게 하는 데 최고의 명약인 사교육만 더 과열되고 팽창할 것이다. 빤한 일이다.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영어를 공용화하면 정말 부자가 되고 선진국이 될 수 있는 걸까. 부자가 되고 선진국이 되면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지에 대한 질문은 차후로 미뤄두더라도, 이건 아무런 근거가 없는 흰소리다. 간단하게, 식민지 시대를 거쳐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동남아 국가들을 떠올려 볼 만하다. 이들 국가는 선진국은 고사하고 영어 사용으로 인한 계층 간 갈등에 골치를 썩고 있는 중이다. 차기 정부의 의지대로라면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고 말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실생활에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필요가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 대다수가 상류층이다.

이게 진실이다. 사실 인수위와 차기 정부의 주장은 이미 영어를 잘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국가 주도로 더 많은 권력을 주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이 못 하는 사람들을 보다 쉽고 편하게 억압하고 착취할 수 있는 구조를 국가가 나서서 만들어주겠다는 심산이다. 일본 메이지 유신 시대의 문교상 모리 아리노리는 저서 <일본의 교육>에서 “영어를 국어로 삼자”고 주장한 바 있다. 야마토 말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으니, 아예 영어를 공용화하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바바 다쓰이를 비롯한 반대론자들이 인도를 예로 들면서 “상류 계급과 하층 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은 영어 공용화 대신 번역 산업을 강화했다. 영어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영어를 공용화하자는 주장이나, 외국인 듣기 편하라고 ‘외래어’ 오렌지를 어륀지로 바꾸자는 논리나 천박하긴 매한가지다. 그 시간에 번역 산업에 대한 국가 지원을 늘리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차라리 강조돼야 하는 건 우리 말 말하기 듣기 쓰기, 그리고 독해 능력이다. 이명박 당선자는 얼마 전 대통령 명함을 팠다. 앞면은 한자로, 뒷면은 영어로 쓰여 있다. 시장 재임 시절 버스 노선부터 서울 시내를 온통 영어로 수놓은 것도 그다. 대선 전 당선자는 국립 현충원에 들려 방명록에 “당신들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겠읍니다. 번영된 조국,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모든것을 받치겠읍니다”라고 썼었다. 다른 후보가 당선됐다고 상황이 나아졌을까? 같은 자리에서 정동영 후보는 “대한민국을 한단계 더 엎그레이드시켜 영령들께 보답하겠습니다”라고 썼다. 둘 다 받침이며 띄어쓰기가 엉망이다. 이건 진영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시대가 바라고 원하며 좇고 있는 ‘성공’의 이미지가 얼마나 허황되고 날조된 것인지 드러내는 지점이다. 영어를 잘 한다고 부자가 되진 않는다.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많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영어에 대한 환상이 부자를 더욱 부유하게, 가난한 자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 뿐이다.

지금 이 시간 독해능력 향상이 가장 절실한 곳은 매일 아침 당선자와 '굿모닝' 인사하는 대통령 인수위다. 당선자가 가끔 연설 대본에 없는 본심을 드러내 국민적 공분을 살 때마다 “오해”라고 해명하는데, 똑같은 말을 듣고 읽고도 풀이가 다르니 뇌 크기가 병아리 수준이거나 남달리 생각이 깊거나 둘 중 하나다. 건국 이래 최고의 자가당착 본말전도 교육정책을 내놓은 걸 보자니 후자는 아니 것 같다.

[허지웅 (GQ 3월호)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