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숨겨진

[도올고함(孤喊)]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


경의선 철도를 다시 잇는 최초의 현장에서. 철조망이 군사분계선.
그 뒤로 북한군 보초가 서 있고, 공사가 진행 중이다.
2002년 12월 16일 촬영.


나는 참여정부가 출범한 이래 남북 화해가 모든 국정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는 열쇠가 되어야 하며, 범세계적 국제역학의 높은 안목 속에서 남북한의 주체적 이니셔티브를 확보하는 것이 정치 리더십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리고 특검 문제로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에 대한 깊은 반성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촉구하였으며, 남북한의 불가결한 실무접촉이 부진한 것을 개탄해 왔습니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는 것을 보고 우리 민족사의 필연적 진전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역사의 추이에 대한 바른 진단을 온 국민이 내려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정상회담이 대선을 앞둔 타이밍의 모든 전술.전략적 가치를 고려할 때 정치적 꼼수가 아니냐는 의혹은 그 논리적 정당성의 여부를 떠나 하등의 의미 없는 훼방의 논리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과 만나겠다는 당신의 의지야말로 긴박한 한반도 상황의 변화 국면을 바르게 진단하고 있으며, 결정적 타이밍을 계속 유실하여 온 지난 역사에 대한 뼈저린 반성에서 우러나온 결단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2000년 말 올브라이트가 북한을 다녀온 후 성사되었던 클린턴 대통령의 임기 말 방북 결정을 북한이 기민하게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7년의 세월이 유실되었고, 6자회담의 성과래야 그 시점의 원점에도 아직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개탄스러운 현실을 회고할 때, 오히려 이 시점에서의 정상회담 성사야말로 꼼수가 아닌 북한의 평화 의지의 천명이라고 평가해야겠지요. 꼼수라면 오히려 차기 정권을 기다릴 수도 있었겠죠. 이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당신의 판단은 여태까지 부시 정권이 도저히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분위기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상황 전개를 고려할 때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의 말대로, 차기 정권은 정상회담의 성과를 당당히 인수인계할 생각을 해야지 구구하게 역사에 역행하는 꼬리표를 달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미국은 6자회담의 틀 안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역사적 추이의 연속성을 고려할 때 매우 정당한 논리입니다. 따라서 핵 문제 해결을 전제로 해서만 남북 정상회담을 용인한다는 보수적 논리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편협한 소견에 불과합니다. 북핵 폐기에 관한 구체적 문제에 연연하여 정상회담이 지지부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6자회담의 틀 속에서 국제적 합의와 공신력을 갖는 과정을 통하여 이뤄져야 할 숙제입니다. 그 검증도 당연히 국제사회의 소관이겠지요. 우리끼리 합의한다고 누가 알아줍니까? 만약 핵 포기를 남북 간의 합의로써 매듭짓는다면, 그 후속 조치로서의 경제적 부담을 전적으로 남한이 떠맡아야 할 것이니 이런 어리석은 소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정상회담은 한반도의 비핵화 방향에 대한 포괄적 선언으로 족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반도의 평화구조를 정착시키는 제반 국방.사회문제와 북한 인민의 삶을 개선시키는 경제적 교류.협력.개발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남한의 중소기업에 대폭적인 활로를 제공할 뿐 아니라, 정치적 안정과 국제적 금융제도를 확보하여 남한의 대기업들이 북한 개발사업에 이니셔티브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전폭적인 합의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윈윈게임을 정교히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북한 사회의 필수적 변화에 대한 당신의 근원적 인식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정책상의 변화일 뿐만 아니라 바로 당신의 주체철학에 대한 창조적인 재해석 내지 혁명을 요구하는 단안입니다. 주체철학은 인간을 물리적 세계의 일원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물리적 세계를 주도해 가는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강조한 유물변증법을 뛰어넘는 이론 체계입니다. 이 이론 체계에 당신이 정말 충실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이나 고착된 정치철학이념에 따라 그 자주성을 규정할 것이 아니라, 그 능동적 주체성을 모든 기존의 정치이념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인민 자신의 진정한 자주성을 확보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기존 이념의 핵에 일인 카리스마 체제가 있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북한의 역사에서도 결국 일인 중심 체제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변화를 당신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